오늘날 한국 교회는 청교도에 대하여 너무나 심각하게 잘못 알고 있다. 그 오해로 인해 수많은 성도들이 죄에 눌려 암울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청교도’라는 단어는 종종 이런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엄격함, 금욕주의, 죄에 대한 끝없는 자기 정죄, 기쁨 없는 경건, 율법적 생활 규범, 어둡고 침울한 신앙의 색조. 많은 이들이 청교도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청교도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이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오해를 넘어 청교도 신학의 심장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은 왜곡이다.
청교도 신학의 핵심은 율법적 암울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을 보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죄를 깊이 다룬 것은 죄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신학 전체는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운동이었다.
이 오해는 크게 세 가지 경로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청교도 신학을 단편적으로 접한 데서 온 오해이다. 청교도들의 방대한 저작들 중에서 죄론이나 양심론의 일부만을 발췌하여 읽을 경우 청교도 신학이 마치 끝없는 자기 검열과 정죄의 신학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체 그림을 보지 않고 한 부분만을 확대할 때 왜곡이 일어난다.
둘째, 청교도 신학을 그들의 사회적·역사적 맥락과 분리하여 이해한 데서 온 오해이다. 17세기 청교도들은 국가 교회의 형식주의와 도덕적 해이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죄를 강하게 다룬 것은 그 시대적 필요에 대한 응답이었다. 청교도들 자신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매우 정교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복음은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게 한다. 이 역동성이 청교도 신학의 생명이다.
셋째, 그리스도 중심성을 상실한 청교도 읽기에서 온 오해이다. 청교도 신학을 윤리적·도덕적 측면에서만 읽고, 그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그리스도 중심성을 놓칠 때 청교도는 도덕적 훈육의 체계로 축소된다. 그러나 청교도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청교도가 본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은 그리스도의 위격(Person)의 영광을 이렇게 묘사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그 신비 안에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이 있다.”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다는 그 실재는 천사들도 들여다보기를 원하는 신비이다(벧전 1:12).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분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사역 안에서 빛난다고 가르쳤다.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계시하셨다.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셨고,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은혜와 권능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가장 깊이 묵상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아름다움이었다. 굿윈의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 주제에 온전히 헌정된 작품이다. 굿윈은 묻는다. 지금 이 순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그의 대답은 충격적일 만큼 아름답다. 그리스도는 땅에 계실 때 가지셨던 그 온유하고 긍휼하신 마음을 영광 중에서도 조금도 잃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향하여 뜨겁다. 그분이 땅에 계실 때 보여주신 그 긍휼, 그 온유함, 그 사랑은 하늘에서도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신다.”
? 토마스 굿윈,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
이것이 청교도 신학이다. 죄인을 정죄하는 냉혹한 심판관이 아니라 죄인을 향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달려오시는 그리스도. 이 책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을 한국 교회 앞에 다시 펼쳐 보이기 위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