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선 한 시인의 기록
시의 언어로 붙든 신앙과 삶, 신앙의 눈으로 되비춘 시와 오늘
미국 시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인 「포에트리」의 전 편집장이자, 시인, 그리고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인 크리스천 와이먼이, 서른아홉 살 생일에 불치의 희귀 혈액암 진단을 받은 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써 내려간 산문집. 출간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신앙과 시, 그리고 삶의 의미에 관한 현대판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와이먼은 텍사스 서부의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 신앙에서 멀어졌던 시인이다. 시에 삶을 걸었고 꽤나 착실한 이력을 쌓았던 그는, 암 진단을 받고 죽음과 마주하면서 시와 예술과 삶의 의미를, 그리고 오래전 멀어졌던 신앙의 의미와 이 시대가 마주한 문제들을 다시 곱씹기 시작한다. 골수 이식을 포함한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의 시간이 그를 다시 신앙으로 이끌었고, 『나의 찬란한 심연』은 바로 그 시간의 산물이다.
이 책은 하나의 서사로 이루어진 회고록이 아니다. 잘 짜인 논증을 제시하는 책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신앙을 변증하는 책도 아니다. 오히려 병상에서, 그리고 병상을 오가는 삶 속에서 조각조각 떠오른 단상과 긴 호흡의 글이 뒤섞인 아포리즘 모음이며, 한편으로는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이나 『신을 기다리며』를, 다른 한편으로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저항과 복종』을 떠올리게 한다(둘 모두 그가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이기도 하다). 어떤 글은 몇 줄의 아포리즘으로, 어떤 글은 시와 신학과 회고가 겹겹이 포개진 긴 사유로 이어진다. 와이먼은 이 흩어진 조각들을 억지로 하나의 매끈한 이야기로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파편성 자체가, 고통 한가운데서 신앙이, 그리고 삶과 시와 예술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다시 찾은 신앙은 모든 의심을 해소한 확신이 아니다. 시몬 베유와 디트리히 본회퍼, 조지 허버트와 폴 틸리히, 메릴린 로빈슨과 오시프 만델슈탐 같은 이름들을 길잡이 삼아, 그는 신앙이 언어와 어떻게 만나고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는지를 추적한다. 신학자들의 언어가 너무 매끄럽고 자신만만할 때, 오히려 시인들의 더듬거리는 언어가 신앙의 실제 결에 더 가깝다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이 책은 흔히 볼 수 있는 변증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간증이 아닌, 시, 그리고 신앙과 더불어 신을, 그리하여 삶을 붙들려 애쓰는 한 사람의 고통스러우나 정직한 시도에 가깝다.
이 책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시의 더듬거리는 언어가 신앙에 가닿으려 애쓰는 동시에, 신앙의 눈이 거꾸로 현대라는 시대와 시라는 예술 자체를 되비춘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시로 신앙을 말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신앙으로 시와 오늘을 다시 읽어내는 책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채 다시 신앙을 마주하게 된 한 시인의 이 고뇌와 분투는 널리 인정받았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요 문예지가 이 책을 호평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2013년 최고의 논픽션으로,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그해 최고의 종교 도서로 이 책을 꼽았다.
신앙을 잃어가는 이들에게도, 신앙을 가져본 적 없는 이들에게도, 신앙 안에 머물면서도 그 언어가 점점 낯설어지는 걸 느끼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말을 건다. 죽음과 의심과 언어의 한계 앞에서, 그럼에도 계속 붙들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