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굴리며 걸었네』에서 여행은 명소를 지나온 순서가 아니라, 장소가 불러낸 기억의 연쇄로 읽힌다. 성도와 고구려 유적, 히로시마와 귀 무덤·코 무덤, 콜로세움과 오르세, 거창과 소록도, 울릉도와 북한산에서 저자는 풍경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땅이 품은 식민과 전쟁, 분단과 독재의 시간을 딸에게 들려준다.
형식 또한 분명하다. 현장 기록과 역사 해설 사이에 ‘엄마의 편지’를 끼워 넣어, 거대한 역사를 한 가족의 생활과 상실, 늦은 공부와 회복의 자리로 끌어온다. “어둠이 세상을 덮어도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너희들의 등불이 될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 책의 윤리를 밝히고, “여행은 엄마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라는 고백은 그 윤리가 저자의 삶에서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여준다.
스톤헨지의 바람과 고흐의 그림, 검은 화산 대지와 고향 바다가 포개지는 순간, 여행은 기억을 다시 견디는 방법이 된다. “길 위에서 손짓하는 빛”을 따라 박인숙은 과거를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딸과 다음 세대가 더 나은 현재를 선택하도록 조용히 등을 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