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이민 40년, 이방인의 삶에서 건진 ‘공존’의 철학
경쟁의 속도를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함께 걷는 삶의 무늬들.
“이민은 지도를 바꾼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풍경을 바꾸었다.”
· 마흔 번의 겨울이 건네는 다정한 안부
1986년 6월, 결혼 5년 차의 젊은 엄마는 세 살 난 큰딸의 손을 잡고 열 달 된 둘째를 가슴에 안은 채 태평양을 건넜다. 손에 쥔 것은 크고 검은 이민 가방 여섯 개가 전부였다. 그로부터 40년. 공장과 작은 가게에서 8시간, 때로는 12시간을 꼿꼿이 서서 삶의 현장을 지켜냈고, 세 딸을 키워 냈으며, 이제는 손주의 손을 잡고 숲길을 걷는 할머니가 되었다. 『안녕, 나의 캐나다』는 저자 수 킴(Sue Kim)이 마흔 번의 겨울을 지나며 길어 올린 삶의 기록이다.
이 책은 단순한 이민 성공담도, 화려한 해외살이 안내서도 아니다. 저자는 ‘빨리빨리’에 길든 한국인이 느리고 답답한 나라에서 쉬는 법을 배우기까지 걸린 긴 시간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휠체어를 탄 친구와 함께 빙판을 도는 아이들, 기러기 떼가 다 건널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운전자들, 성적 1등에게는 박수를 보내되 공동체에 헌신한 아이에게 교장 상을 건네는 졸업식. 낯선 땅의 일상에서 마주친 장면들은 저자에게 경쟁보다 ‘공존’이 더 큰 풍요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책에는 캐나다라는 나라의 민낯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정의 한 번 만나기 어려운 느린 의료, 월급의 상당 부분을 떼어 가는 세금, 치솟는 물가. 그러나 저자는 불평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편이 쓰러져 4주간 입원했을 때 경험한 무상의료의 품격, 노후를 지탱해 주는 연금과 약값·치과 보조 제도, 70대에도 연극 무대에 오르는 이웃이 있는 커뮤니티 센터까지. 40년을 실제로 살아 낸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생생한 정보와 균형 잡힌 시선은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그 모든 이야기의 바탕에는 ‘모자이크’라는 따뜻한 철학이 흐른다. 서로 다른 모양과 색깔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 수많은 민족이 어우러진 캐나다에서 한국인은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가장 선명한 조각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의 삶 또한 각기 다른 시련과 기쁨이 모여 비로소 완성된다. “뿌리 뽑힌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저자의 고백처럼, 옮겨 심은 자리에서도 삶은 이전과 다른 빛깔의 잎을 틔운다.
『안녕, 나의 캐나다』는 인생의 후반전이라는 새로운 출발선에 선 이들에게, 혹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숨이 가쁜 이들에게 건네는 정중한 초대장이다. 매일 아침 커피 한 잔과 함께 시작되는 산책과 글쓰기의 시간 속에서 저자는 말한다. 인생은 정복해야 할 산이 아니라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야 할 오솔길이라고, 그리고 행복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40년 만에 깨달은 이 평범하고도 위대한 진리는 독자의 마음속에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