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서면의 한 카페에서 만난 마흔두 살 직장인 한 분이 자기 휴대폰을 제게 보여 줬습니다. 전자책 앱 안에 산 책이 314권 들어 있었습니다. 그중 끝까지 읽은 책이 몇 권이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세다가"열한 권쯤"이라고 답했습니다. 결제 내역을 합산해 보니 그 314권에 쓴 돈이 287만 원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은 열한 권을 기준으로 따지면, 책 한 권을 완독하는 데 26만 원을 쓴 셈입니다. 이분은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매체를 고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출퇴근길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알림이 3분에 한 번씩 뜨는 휴대폰으로, 집중해서 곱씹어야 할 전공 서적까지 전부 밀어 넣었던 겁니다. 화면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 화면에 맞지 않는 책을 욱여넣은 선택이 287만 원을 허공에 날렸습니다. 당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읽었는데 한 달 뒤엔 제목밖에 기억나지 않는 책. 종이로 샀다가 글자가 작아 덮어 둔 책. 전자책으로 또 산 줄 모르고 같은 책을 두 번 결제한 경험. 이건 의지의 문제도, 머리의 문제도 아닙니다. 무엇을 읽느냐와 어디서 읽느냐를 한 번도 따로 떼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벌어지는 일입니다. 서점가에 떠도는 조언은 늘 둘 중 하나입니다. "역시 종이지, 손맛이 있잖아. " 아니면"요즘 누가 종이를 봐, 다 전자책이지. " 이 두 진영은 15년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