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종은 1966년 22세의 창창한 나이에 『전남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아동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같은 해 같은 신문의 지령紙齡 5천 호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함으로써 일찍부터 장편 작가로서의 미래를 예고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동아일보』와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한꺼번에 단편소설 당선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는 해를 거르지 않고 작품집을 상재上梓해 오면서, 작가로서의 열의와 성실성이 무엇인가를 온 문단과 세상에 확연히 알려주었다. 그 결과로 이제껏 10여 개의 이름 있는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으며, 우리 문학의 창달暢達을 위한 역할이나 문단 활동에 있어서도 영일寧日 없이 지속적인 노력을 다해 왔다.
백시종의 소설, 특히 매년 한 권씩 나오는 장편소설에 주목하며 어떻게 이처럼 쉬지 않고 자신의 소설 세계에 집중할 수 있을까. 경우에 따라서는 소재가 마를 수도 있고 일신의 기력이 지칠 수도 있을 법한데, 그는 대체 어떤 비법을 갖고 있단 말인가. 아마도 이 지경에 이르자면, 간단없이 소설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필설로 옮기는 데 소요되는 지구력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러겠다는 의지만 갖고서 될 일도 아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그에게는 신들린 듯한 문학에의 정념情念이 있다 할 터이고 그것이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숙명이라 해야 마땅할 터이다.
백시종의 이번 장편소설 『보리밭 사잇길로』는 월간 『시인』 잡지에 2025년 1월부터 1년간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펴낸 책이다. 12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자전적 성격으로, 유명 문인들의 실명이 그대로 거론되는 실화 소설이다. 생생한 현장감과 역사적 사실성을 전달하기 위해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가 자신이 직접 겪은 문단사의 풍경이나 문인들과의 교류를 기록할 때, 실명을 사용하는 것은, 그 글이 지닌 기록적 진정성을 높여준다. 조태일, 이성부, 김현승, 김만옥, 최동일, 신중신, 윤금초, 김상옥, 김동리, 김승옥, 서정춘, 정을병 같은 문인들이 주 대상이다.
실명을 거론하며 문단사를 회고하는 형식은, 작가가 그 기록의 진정성과 무게를 온전히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형태가 아닐까. 다만 문학적 감동과 역사적 기록의 가치 사이에서, 문학이 품어야 할 진실과 실존 인물이 가진 역사적 무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작가의 피할 수 없는 고뇌도 엿보인다. 얽히고설킨 인연과 상처를 가감 없이 소설의 지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을 더듬는 것을 넘어 자신의 치부나 아픔까지 온전히 드러내야만 가능한 치열한 고행에 가깝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문학이 지녀야 할 마지막 예의와 진정성, 객관성을 지키려 노력한 그 여정에 깊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교 시절 시인 조태일과의 교우를 통해 서로를 지탱해 가는 젊은이들의 연대와 성장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계림동·대인동·광천동 등 1960년대 광주의 구체적인 공간과 토속적인 전라도 사투리는 작품의 현장감을 한층 높여준다. 또한 조태일은 치열한 문학 정신과 성실한 생활력이 조화를 이루는 입체적 인물로 형상화되며, 문학은 삶을 끝까지 견디어 내는 태도임을 보여준다. 밥을 짓듯 시를 짓고, 치열한 현실을 온몸으로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청춘들의 모습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당시 광주 우체국 로비인 ‘우다방’은 돈 없는 문학 지망생들이 모여 시대와 문학을 논하던 아지트였다. 낡은 잡지를 품고 사상과 철학을 이야기하는 청년들 사이에서도 조태일은 유행과 허세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화자는 조태일을 따라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목격하며 시대의 현실과 마주하고, 김현승 시인이 이끄는 와이싸롱에서 이성부 등 선배 문인들을 만나 문학의 세계를 넓혀 간다. 영화감독을 꿈꾼다는 자신의 포부를 솔직하게 밝히는 장면에서는 청춘 특유의 순수함과 패기도 엿보인다.
대학생이 된 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마저 무산된 화자는 극심한 추위와 허기에 지친다. 그때 청량리의 자취방에서 조태일과 임재훈이 내어준 설렁탕과 흰쌀밥은 절망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따뜻한 위로이자 인간적 연대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백시종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소설가의 길을 이어 갔다면, 조태일은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실천적 시인의 길을 선택했고, 최동일은 현실 앞에서 문학을 내려놓은 또 하나의 문학청년으로 남는다. 그는 완벽을 추구했던 만큼 좌절의 상처도 누구보다 깊게 받아들였고, 결국 조용한 교육자의 삶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마무리한다. 작가는 그를 실패한 시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을 끝까지 사랑했기에 더욱 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영혼으로 기억하며 따뜻한 연민을 보낸다. 이 장은 사라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시대가 끝내 품어 주지 못했던 수많은 문학청년의 초상을 복원하는 애도의 기록이다. 동시에 문학과 삶은 언제 서로를 지탱하고, 언제 서로를 포기하게 만드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남긴다.
1968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출신인 김년균, 최태성 등 시인들이 광주에서 전국 순회 시화전을 열지만, 작품은 팔리지 않고 여관비와 술값마저 감당하지 못하는 곤경에 처한다. 이를 해결하려던 과정에서 문화부 기자와 지역 유지가 얽히며 예기치 않은 소동이 벌어지고, 결국 갓 신혼여행을 다녀온 시인 주동후가 결혼 선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맡겨 술값을 대신 치르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진다. 뒤늦게 소설가이자 송정리우체국장인 이항열이 시화를 구입하며 밀린 비용을 정리하고, 문인의 자존심을 잃지 말라는 따뜻한 격려를 건네면서 사건은 마무리된다.
시화전 해프닝은 문단풍속사를 엿보게 하는 흥미로운 기록이기도 하다. 순수한 예술을 꿈꾸면서도 당장의 밥값과 숙박비 앞에서 속수무책이던 문인들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깊은 연민을 남긴다. 신혼 직후 손목시계를 맡기고도 웃음을 잃지 않는 주동후의 모습, 그리고 “술 얻어먹는 문인이 아니라 술을 대접하는 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항열의 말은 이 장을 관통하는 정신을 압축한다. 작가는 시대를 원망하기보다 그 모순 속에서도 문학의 품위를 지키려 애쓴 청춘들의 삶을 따뜻한 유머와 깊은 애정으로 그려 내며, 한 문학청년이 참된 작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잔잔한 감동 속에 완성한다.
6장의 미덕은 비루한 현실과 숭고한 예술이 맞닿는 아이러니를 생생하게 포착한 데 있다. 등잔불 아래의 공부, 하수구와 파리 떼가 들끓던 변두리 풍경, 무등산에서 지게를 지고 땀 흘리는 청년의 모습은 당시 문학청년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사실적으로 전한다. 특히 절박한 독서 욕망에서 비롯된 작은 일탈이 한 사람을 문학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예술을 향한 갈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8장에서는 역사와 운명이 한 개인에게 남긴 깊은 상처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성찰한다. 특히 송기원이 시대의 폭력과 가족의 상실을 견디며 끝내 문학과 수행으로 자신을 지켜 내는 과정은 이 작품에서 가장 묵직한 울림을 전하는 대목이다. 죽음을 예감한 딸을 말없이 배웅하는 아버지의 뒷모습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버마로 향하는 송기원의 마지막 발걸음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시인 이성부는 처음에는 엄격하고 거리감 있는 선배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시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문인으로 기억된다. 간암 투병 중에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고, 생애 마지막에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남긴 시편은 그의 문학과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화자가 그의 추모사업을 위해 무등산 자락에 〈무등산〉 시비를 세우려 했으나 행정적 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일화는, 한 시인을 기억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새삼 일깨운다.
백시종의 자전적 장편소설 『보리밭 사잇길로』는 한 문인의 자전적 회고록을 넘어선다. 이 작품은 1960~70년대 한국현대문학의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한 문학청년들의 집단 기억을 복원한 기록이다. 가난과 시대의 폭력, 우정과 배신, 좌절과 성장을 거쳐 마침내 화해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문학은 여기서 삶을 견디게 한 마지막 버팀목으로 존재한다.
특히 작품 후반부를 이끄는 정을병의 이야기는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문학의 윤리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그는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락하고, 문단의 원로였으나 한 인간으로서는 많은 허물과 상처를 남긴다. 화자 역시 그의 거짓 증언으로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지만, 그를 원망 속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마지막 유언을 품고 문학비 건립을 위해 애쓰며, 개인의 감정을 넘어 문학이 지녀야 할 의리를 실천한다. 이 작품이 깊은 울림을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는 앵강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정을병의 문학비 앞에서 지난 세월을 조용히 돌아본다. 그 순간 독자는 원망이 용서로, 상처가 이해로 바뀌는 긴 시간을 함께 건너왔음을 깨닫게 된다. 작품 전체를 흐르던 갈등은 잔잔한 수묵화처럼 가라앉고, 남는 것은 사람과 문학을 향한 깊은 신뢰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시대의 풍파 속에서 흔들렸지만 끝까지 문학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것은 화려한 명성보다 삶을 견디어 낸 강한 정신이다. 그 정신은 오늘의 독자에게도 오래 살아 있는 울림으로 다가오며, 문학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묻는다. 문학은 사람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고 이해하는 일이며, 상처를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으며, 그것을 화해로 이끄는 힘이다. 그래서 장편소설 『보리밭 사잇길로』는 한국현대문학이 오래 간직해야 할 소중한 증언이며, 사람과 문학이 서로 구원하는 통로임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기록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