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를 위한, 우리의 책무란 무엇인가
집단학살 3년, 국내 필자 8인의 목소리
이스라엘이 3년 넘게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집단학살을 벌이고 있다. 휴전이 선언된 뒤에도 공습과 봉쇄는 멈추지 않았고, 학살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동안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으로 폐허를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증거는 차고 넘쳤지만 그만큼 무력감과 피로감도 쌓였다. 이 책 『가자로부터 멀리 떨어져』는 그 무거운 무력감에서 출발한다.
최근 출판계에서는 팔레스타인을 다룬 책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번역서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이 책은 집단학살이 이어지는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필자 여덟 명이 자기 자리에서 쓴 글을 묶었다. 학살 국면에서 한국 필자들의 글을 한 권으로 모은 책은 (아마) 없다. 필자들은 ‘물론’ 가자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거리를 변명으로 삼지 않고,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혹은 머무른다).
필자들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부르는 일을 어색해한다. 안락한 자리에서 먼 땅의 학살을 글로 쓰는 일이 부끄럽고 때로는 역겹다는 것을 서문에서부터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그 부끄러움이 침묵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고, 우리의 평화가 그들의 비참 위에서 유지되고 있다면, 말할 자격이 없다는 느낌이 곧 말할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은 자격 없음의 자각을 면죄부로 삼지 않고, 바로 그 자각에서 글쓰기의 의무를 끌어낸다.
그 출발점은 각자의 입장, 즉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이다. 영화감독 백종관은 크리스 마커가 1960년대에 만든 이스라엘 영화와 〈베트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를 다시 읽는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연대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더 신중하게 묻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시와 번역을 읽는 문학평론가 최가은은 폐허에서 단 한 문장만 남더라도 그 문장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문장을 우리의 언어로 이어 쓰는 일이 곧 번역이고 연대라는 것이다. 방송국 PD 오학준은 한국 언론이 국제뉴스로 가자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되짚는다. 그는 집단학살을 집단학살이라 부르고 잔해를 끝내 그러모으는 일이 저널리즘의 몫이라고 답한다.
철학의 자리에서는 정치철학자 배세진이 날카롭게 묻는다. 그는 가자를 사유하지 못하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고 말하고(‘서서 죽은 철학’), 오늘의 철학이 싸워야 할 전장은 가자라고 단언한다. ‘책상머리 지식인’이 학살 앞에서 레닌처럼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부록은 이 책의 출발점이 된 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논쟁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활동가이자 작가인 한유리는 용주골에서 성노동자를 쫓아내는 논리가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을 몰아내 온 논리와 닮았다는 말을 듣고, 먼 땅의 문제를 이 땅의 현장으로 끌어온다. 과학기술학(STS) 연구자 강정섭은 들뢰즈의 팔레스타인 글을 번역하며 시작한 질문 끝에 팔레스타인을 이해하는 일보다 관계 맺는 법을 배웠다고 쓴다. 철학 연구자 이민혜는 영화 〈힌드의 목소리〉를 매개로 가자의 고통이 피드 속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비판한다. 편집자지다율은 출판인으로서 책을 만든다는 일의 옹색함을 견디며, 가자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답한다.
책의 끝에는 필자 여덟 명의 대화와,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가 이탈리아 출신 연구자 루카 살차와 나눈 대담 「가자를 사유하다」가 실려 있다. 발리바르는 집단학살 앞에서 사유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물음에, 사유의 가치는 자신의 빈곤과 요구를 얼마나 제대로 가늠하느냐에 달렸다고 답한다. 그는 가자의 사태가 앞으로 올지 모르는 ‘가능성’이 아니라 눈앞에서 진행 중인 집단학살이라고 말하며, 침묵은 그 자체로 공범이라고 잘라 말한다. 나아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오히려 이 학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는 역설을 짚고, 유럽 식민주의가 만든 말살의 방식이 중동으로 수출되어 지금의 가자에 이르렀다는 계보를 그린다. 그에게 가자는 한 지역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관계를 바꾸는 세계적 사건이다. 한국의 필자들이 던지는 질문이 지구 반대편의 철학자와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순간이다.
『가자로부터 멀리 떨어져』는 가자를 (감히) 이해했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가 가자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 거리를 알고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할 수 없는지를 끝까지(혹은 처음부터, 다시) 따져 묻는 책이다. 학살이 3년 넘게 이어지는 지금, 이 책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약속이다. 서문의 마지막 문장처럼, 이번에는 가자와 팔레스타인을 위한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