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삶에 다시 들어온다. 누군가의 마지막 말과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는 마음, 낯선 이에게 밥과 피를 나누던 손길 속에서 우리는 그날의 진실과 만난다. 전남5·18민중항쟁46주년기념 시화집 『오월, 기억을 건너다』는 여러 시인의 시와 두 화가의 그림을 통해 오월을 살아낸 사람들을 우리 앞에 다시 불러낸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건네는 증언과 애도는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오늘의 삶에서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 묻는다.
이 책은 광주를 넘어 전남 곳곳으로 이어졌던 항쟁의 기억에 주목한다. 목포에서, 나주에서, 해남에서 사람들은 길을 나섰고, 소식은 마을과 마을 사이를 건너갔다. 부상자를 돌보고 차량을 운전하고 음식을 준비하며 서로를 지킨 시민들의 헌신이 오월의 역사를 이루었다. 시화집의 첫머리에 놓인 기록들은 이름 없이 공동체를 떠받쳤던 이들의 존재를 환기하며, 뒤이어 펼쳐지는 시들을 읽는 바탕이 된다.
시인들은 죽음과 상실의 구체적인 모습을 되살린다. 황지우의 「윤상원」은 끊어지는 호흡과 동료를 부르는 목소리로 한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전한다. 이소연의 「꽃마음」에서는 생일의 기쁨과 공포가 함께 적힌 어린이의 일기장이 폭력에 짓밟힌 일상을 증언한다. 정희정의 「오월 밤」은 울음조차 삼켜야 했던 어머니와 세월 속에서도 늙지 않는 부재의 얼굴을 겹쳐놓는다. 시는 희생자 한 사람의 죽음에 가족의 삶과 이루지 못한 미래가 함께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애도에는 살아남은 사람의 부끄러움과 책임도 스며 있다. 박성민의 「마늘」은 “깔수록 자꾸 눈물 나는 미안한 80년대”를 불러내고, 이설야의 「잿더미 속의 붉은 책」은 억압 속에서 접한 진실을 여전히 덮을 수 없는 책으로 남겨둔다. 임동확의 「사십 년」은 오월의 죽음이 정치적 수사 속에서 생생한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기억하는 사람 자신의 태도까지 돌아보는 이 질문들이 시화집의 깊이를 더한다.
오월을 오늘로 이어오는 힘은 기억을 함께 나누는 데서 생겨난다. 박설희가 「오월」에서 말하는 “일인 분의 역사는 없다”는 구절은 여러 목소리가 모인 이 책의 의미를 집약한다. 강덕환의 「작별하지 않는 소년」은 제주4·3의 피신처와 광주의 상무관을 잇는다. 공포에 떠는 아이를 품고, 시신을 거두고, 주먹밥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 다른 역사 속에서도 이어져 온 공동체의 힘을 드러낸다. 나종영의 「오월은 바로 오늘이다」는 이 힘을 지금 여기에서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실천으로 이끈다.
기억의 길은 국경 너머로도 뻗어간다. 세계 여러 나라 작가들의 메시지는 전쟁과 폭력의 상처를 마주하며 평화의 가능성을 묻는다. 특히 베트남 시인 찜짱의 「수련꽃」에서 폭탄 구덩이에 핀 붉은 꽃은 사라진 누이의 몸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의 아픔을 기억하는 마음은 이 꽃 앞에서 다른 땅의 희생자들에게도 다가간다. 각기 다른 상처를 알아보고 곁을 내어주는 일이 오월의 정신을 넓혀간다.
시와 함께 놓인 그림들은 기억을 만나는 또 하나의 통로다. 조혁일의 선묘와 방지연의 수묵, 이 둘이 만들어낸 색과 여백은 시가 불러낸 인물과 사물 앞에 독자를 더 오래 머물게 한다. 촛불을 든 손과 남겨진 시계, 기도하는 형상은 말로 다 전하지 못한 감정을 이어받는다. 쓰기와 그리기가 만나는 자리에서 오월의 기억은 더욱 생생한 감각을 얻는다.
『오월, 기억을 건너다』는 그날의 아픔과 함께 사람들이 서로를 지켜낸 마음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시화집이다. 다양한 시적 목소리와 절제된 그림은 슬픔을 헤아리는 시간을 열고, 그 슬픔 속에서 이어갈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오월을 기억하는 일은 오늘 우리 곁의 고통을 알아보는 일과 연결된다. 이 시화집은 그 연결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의 뜻을 새롭게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