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시조의 동량棟樑이 되겠다는 결기를 “종지라도 되”(「작아서 아름답다」)겠다는 반어反語로 표현한다. 겸허와 하심을 이기는 지혜는 없다. 이 지혜는 「받침 하나」로 언어에 대한 민감도가 높을수록 좋은 글이 된다는 이면의 말을 전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운 중에는 의도하지 않은 일에서 ‘뜻밖의 뜻’을 얻는 행운도 있다. 넘어져 골절되고 아무 일 없이 걷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옆 사람에게 아무 일 없는 하루가 감사하고, 지붕 있는 집에서 자고 일어나 따뜻한 물 마실 수 있어 “고맙다”. “작은 것”에 “기뻐”하며 “오늘도 별일 없”음에 감사하는 마음. 이 “마음이 눈뜨는 자리”가 곧 깨달음 아닌가. 눈뜨는 아침이 내 생일이고 오늘은 이 하루를 “기쁨 한 상”으로 받은 날. 이렇게 아름다운 바보처럼 사는 것도 좋지 않은가(「기쁨을 끓이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 했으니 시 또한 시인을 대변한다. “허름한” “이름”에 더 “애틋”한 정이 가는 건 “목도장” 파는 “김 씨”만이 아니다. 세상살이에 지쳐 스러져 가는 이들에게 “훅 하고 숨을 불어 넣”어 “살”려내는 마음(「건물 사이 성자聖者」). 시를 쓰는 일은 수행修行과 다르지 않다. “빙판을 걷다” “중심 잃고 휘청댈 때” 시인도 건물 사이 성자처럼 “소금”처럼 “붙잡아 주고” “손잡아 주는 사람” 아닐까(「눈과 소금」).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이 ‘자비와 연민’이라면 ‘사랑과 감사’를 담아 육친의 생을 노래한 「쇼」는 극명하게 절제된 사부곡思父曲이다. 한 가계의 “고단했고” “뜨거웠던” 서사를 미사여구 없이 담아낸 「쇼」는 한 편의 처절한 경이驚異다.
늦게 온 시조의 동량지재棟梁之材에게 저음低吟으로 오래가는 갈채와 환호를 보낸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그의 길에 첫 시조집 『기쁨을 끓이다』에서 시작되는 높고 고요한 노래가 번져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