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이제 끝났다." 이 말을 처음 들은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뉴스 자막에서, 술자리 대화에서, 경제 영상의 썸네일에서 너무 자주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30년째 제자리이고, 엔화는 끝없이 미끄러지고, 1인당 소득은 한국에 추월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본은 이미 무너진 나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국제 전망에서도 일본의 경제 규모는 여전히 미국, 중국, 독일 바로 다음입니다. 30년을 잃어버렸다는 나라가 어떻게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을까요.
심리학에는 이 착시를 설명하는 오래된 개념이 있습니다. Amos Tversky와 Daniel Kahneman은 1973년 Cognitive Psychology에 실은 논문 “Availability: A Heuristic for Judging Frequency and Probability”에서, 사람들은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사례일수록 더 흔하고 더 확실하다고 판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주 들은 말은 어느새 사실처럼 굳어집니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표현도 그렇게 우리 안에 자리 잡았을지 모릅니다.
물론 일본이 오랫동안 멈춰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장률은 낮았고, 물가는 오르지 않았고, 젊은 세대의 지갑은 얇아졌습니다. 이 책은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경제학자들도 이 정체의 원인을 두고 오래 논쟁해 왔습니다. Fumio Hayashi와 Edward C. Prescott는 2002년 Review of Economic Dynamics에 발표한 논문 “The 1990s in Japan: A Lost Decade”에서 그 원인을 생산성 둔화에서 찾았습니다. 금융 부실이나 수요 부족을 더 중요하게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일본이 긴 정체를 겪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 책이 묻고 싶은 것은 그다음입니다. 잃어버렸다면 무엇을 잃었고, 무엇은 지켜냈을까요. 2025년일본이 해외 투자로 벌어들인 소득은 41조 엔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다시 썼습니다. 세계의 반도체 공장은 일본의 소재와 장비 없이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1억 2천만 명이 넘는 부유한 소비 시장도 아직 건재합니다. 성장은 멈췄지만, 쌓아 둔 것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시계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IMF는 2027년 일본이 인도와 영국에 밀려 세계 6위로 내려갈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인구는 줄고 있고, 고령층이 쥔 막대한 금융자산은 2030년대를 지나며 서서히 흩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경제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은 방위비를 늘리고 안보 정책의 방향을 바꾸며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역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를 두고 해석은 엇갈리지만, 한국이 그 바깥에 있을 수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한국인에게 일본은 언제나 감정이 먼저 앞서는 나라입니다. 존경과 경쟁심, 상처와 경계가 한데 뒤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더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감정이 앞서면 숫자가 보이지 않고, 숫자가 보이지 않으면 전략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일본을 칭찬하려는 책도, 깎아내리려는 책도 아닙니다. 일본이 왜 아직 쓰러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서 흔들릴 수 있는지를 사실을 따라 차분히 짚어 보려는 책입니다. 판단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당신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