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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네 사람 시몬
글쓴이
임석인 저
출판사
BOOKK(부크크)
출판일
2026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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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분야종교
로마의 짙은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밤입니다. 티베르 강 너머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작은 다락방 창틈을 파고들어, 흔들리는 올리브기름 등잔불의 심지를 위태롭게 어루만집니다. 그 희미한 빛의 끝자락에 기대어, 백발이 성긋한 한 노년의 사역자가 무릎 위에 놓인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루포입니다. 로마 교회를 섬기며 제국의 핍박과 숱한 고난의 시기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그의 시선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내온 편지의 마지막 장면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닳고 닳은 양피지 위에 먹물로 꾹꾹 눌러쓴 이 한 줄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는 동안, 루포의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립니다. 이 짧고도 단단한 문장 안에는 단순히 한 가족을 향한 안부를 넘어, 인간의 지혜로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구원의 섭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자 그의 기억은 등잔불의 일렁임을 타고 수십 년의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어, 유대 땅 예루살렘의 건조하고 붉은 먼지가 흩날리던 그날의 골고다 언덕으로 향합니다.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 북아프리카의 비옥한 해안 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이방인들의 화려한 문화 속에서도 평생토록 시온의 성전을 향한 지독한 향수와 거룩한 갈망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평생의 단 한 번뿐일 소원, 곧 거룩한 유월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험난한 바다의 파도와 거친 광야의 모래바람을 지나 마침내 예루살렘 성문에 당도했노라며, 그날의 감격을 들려주던 아버지의 눈빛을 루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흠 없는 어린양을 바치려 했던 아버지의 오랜 계획은 완벽하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허락하신 유월절 제물은, 화려한 제복을 입은 제사장들이 흠을 살피고 백성들이 찬양을 부르며 드리는 율법의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성문 밖 한적한 시골길에서 예기치 못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로마 백부장의 강압적인 징발 명령에 의해, 채찍에 맞아 살점이 뜯겨 나간 낯선 사형수의 피 묻은 십자가를 억지로 자신의 어깨에 짊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훗날 어린 자식들을 앉혀놓고 그날의 끔찍하고도 영광스러운 감각을 수도 없이 되짚어 주셨습니다. 어깨뼈를 무자비하게 짓누르던 거칠고 묵직한 나무의 무게감, 이방인 군병들의 서늘한 창끝이 뿜어내던 서슬 퍼런 위협, 주변을 에워싼 군중들의 날 선 조롱과 비명,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던 십자가의 진짜 주인, 그분의 헐떡이면서도 한없이 평온했던 숨소리를 말입니다.

처음 십자가를 어깨에 얹었을 때,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준비한 정결 예식이 사형수의 피로 인해 무참히 부정해져 버렸다는 깊은 절망과 수치심에 몸을 떨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도 아닌데, 이름 모를 자의 저주받은 형틀을 대신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올라야 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골고다 언덕의 정상에 이르러, 그 사형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며 자신을 찌른 자들을 향해 하늘로 올렸던 용서의 기도를 듣는 순간, 아버지의 영혼을 겹겹이 두르고 있던 율법의 견고한 수건은 마침내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강요된 멍에인 줄만 알았던 그 핏빛 얼룩진 나무는, 사실 우리 가문 전체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창세 전부터 마련된 은혜의 솔기였습니다. 만약 그날 로마 군병의 창끝이 다른 사람을 지목했더라면, 만약 아버지가 그 시간에 그 좁은 골목을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은 결코 진짜 유월절 어린양의 보혈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영적 유산은 어머니의 굳건한 기도와 합해져, 마침내 이방 선교의 거대한 문을 여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제 루포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내 어머니'라고 칭송했던 그 영광스러운 서신을 가슴에 깊이 품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억지로 짊어졌던 십자가는 결코 억지가 아니었으며, 율법적으로 실패한 순례의 길은 은혜로 빚어진 가장 완벽한 구원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환난과 강요된 고난이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지라도, 그 형틀의 끝자락에는 세상을 이기신 그분의 피 묻은 손길이 닿아 있음을 이 늙은 사역자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등잔불의 심지를 돋우며, 루포는 아버지가 걸어가셨던 그 멀고도 신비로운 구레네의 붉은 흙길을 향해 경건한 마음으로 첫 번째 기억의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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