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내가 먼저 세상을 읽으면 된다.”
가을바람이 불고 한 사내가 등불 앞에 앉아 시를 읊습니다. 창밖에는 삼경의 비가 내리고, 소리는 자꾸 괴롭게 갈라집니다. 온 세상에 내 소리를 알아듣는 이가 드물다고 적은 사람은 신라의 최치원입니다. 열두 살에 당나라로 건너가 열여덟에 급제하고 반란군 우두머리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까지 쓴 그가, 어째서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했을까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내가 먼저 세상을 읽으면 된다』는 〈한국철학전집〉 여덟 번째 권으로, 최치원이 남긴 글을 따라 그의 생애를 읽는 인문 에세이입니다. 아버지의 엄한 한마디, 남이 백 번 하면 천 번을 했다는 공부, 군막에서 쓴 만 편의 글과 열에 하나만 남긴 『계원필경』, 시무 십여 조, 가야산의 물소리, 누런 잎의 계림과 푸른 소나무의 곡령을 쓴 여덟 글자까지 차례로 짚습니다.
이 책이 눈여겨보는 것은 불우함이 아니라 읽는 눈입니다. 최치원은 황소의 기세가 아니라 그 기세가 꺾일 날을 읽었고, 무너지는 나라의 아픈 곳과 시대가 넘어가는 방향을 읽었습니다. 격문에서는 상대가 천하에 홀로 남았음을 일깨운 뒤 돌아설 길부터 열어 보였고, 남의 이름으로 쓰는 글에도 자기가 본 세상을 담았습니다. 책은 그 장면마다 회의실에서 묻힌 기획안, 기울어 가는 조직, 막힌 일 앞의 우리를 나란히 놓습니다.
알아주지 않는 날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날 눈이 안으로만 향하면 원망이나 자책이 남고, 바깥으로 향하면 읽을 것이 남습니다. 이 책은 그 갈림길에서 지금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부터 적어 보게 합니다. 천 년 전 등불 앞의 사내가 다음 날 아침 다시 붓을 들었듯, 오늘 당신이 본 것을 한 줄 적어 두는 일에서 읽기는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