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은 네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적멸, 가변차선의 날들, 고독의 기원, 다시 적소에서. 적멸은 해탈이다. 대개 해탈에 이르려면 아무 생각이 없어야 한다지만, 해탈은 세속을 차근차근 밟고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그래서 시인은 아주 꼼꼼하다.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그는 무엇을 버렸을까/그가 버린 게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먼저 버린 것이 있을 것이다/ ...... 아니 지금 남은 것은 빈 가방이고 그가 보이지 않는다/그는 빈 가방 대신 그 자신을 버린 것 같기도 하다(빈 가방)'
가방이 있다면, 그것이 지금은 비어 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마지막으로 담겨 있던 것이 있다. 세속은 차근차근 따져가다보면 작은 통찰들로 이어진다. 이 시집의 제목인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역시 이런 통찰 가운데 하나이다.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그렇다고 시집에 실린 시 모두 세속의 작은 통찰을 찾느라 눈이 벌개 있는 것은 아니다.
'......약이 잘 안 듣나 봐요 약사는 입맛을 다신다/무슨 글 쓰세요? 시 써요 그런데 요즘엔/잘 안 써져요 약사의 얼굴이 문득 환해진다/시 같은 것 쓰지 마세요 아니면 어깨힘/빼고 쓰세요 약도 안 지어준다/ 약사 처방대로 시 안 쓰고 펑펑 논다/ 쓰더라도 어깨힘 뺀 시만 쓴다, 과연/며칠 뒤 거짓말처럼 어깨는 말짱해진다/약사에게 시비평가로 활동해볼 것을 권유할 참이다(어깨결림)'
97년 대선, 사우나실, 자장면 등의 작은 것들도 유쾌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끔 술을 많이 마셔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 있을 법한 시인(기억을 놓치다)이 보여주는 자기 생활의 일부 역시 작고,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