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A is for Apple, B is for Bear……, Z is for Zebra처럼 짓는 사람 마음대로 A부터 Z까지 알파벳에 맞는 단어를 골라 만드는 놀이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시간순에 따라 흘러가지 않고, A부터 Z로 시작되는 장소를 따라가며 주인공 피에트로가 살아 온 삶을 보여 준다. 삶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에서 피에트로의 기억은 시공을 넘나들며 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과, 첫사랑의 뼈아픈 실패 등 감춰져 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런던, 파리, 뉴욕, 로마, 홍콩 같은 익숙한 곳들은 물론이고 블라디미르치, 몽스, 콜롬보, 이비사와 같이 조금은 낯선 도시들을 넘나들며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국의 풍경을 마음껏 만날 수 있다. 작가는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력을 드러내며 수많은 장소들이 가진 독특한 역사와 분위기를 독자가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주인공이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지명들은 알파벳에 의해 흐트러진 소설 속 시간들을 정렬시켜 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곳곳에 등장하는 지명에서 뜻밖의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과 앞쪽에서 스쳐갔던 이름을 다시 한 번 뜻하지 않게 만나는 즐거움도 이 책에서 맛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이 책에서는 여행길에 만나는 수많은 정보들이 독자들에게 때로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인공 피에트로의 시선은 이 다양한 정보를 하나로 꿰어 낸다. 작가는 자아 혹은 정체성 탐색의 여정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섬세하고 흥미로운 성장기를 빚어낸다. 때때로 엿보이는 따뜻한 유머는 비극까지 아름답게 보이게 만든다. 결국 이 소설은 자아 찾기를 위한 한 남자의 인생 여행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