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피노자 사상의 출발점,《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정치적, 사상적 혼란 속에 기존 지식의 권위가 흔들리던 17세기 유럽에서 스피노자는 신과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제시함으로써 이후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불리는 스피노자는 철저하게 자연 법칙을 통해 세계에 개입하는, 세계를 초월해 있는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개념과, 신의 관념을 형성해내는 인간 지성의 확실성 및 지성의 자기 탐구로서의 철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책세상문고?고전의세계 074, 발췌 번역)는 스피노자가 생전 자신의 이름으로 유일하게 출판한 것으로, 스피노자 사상의 발아 지점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에 대한 비평적ㆍ비판적 해설서인 이 책은 데카르트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고유의 사상을 형성해가던 스피노자 철학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인간 인식의 확실성, 신 존재 증명, 자유와 필연 등 두 철학자의 공통된 문제의식과 이에 대한 상이한 해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서 발생하는 신의 실존 문제를 관념의 문제로 전환해 ‘우리 안에서’ 신의 관념을 ‘형성해낸다’고 주장함으로써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지성이 형성하는 가장 완전한 관념으로서의 신을 제시한다. 또한 부록〈형이상학 반성〉에서는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인 ‘속성’과 ‘양태’를 통해 존재자와 신의 속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고 있는데 이런 개념은《에티카》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또한 중세 말 스콜라 철학은 물론 당시 네덜란드의 데카르트주의를 주도하던 제도권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초기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연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인식을 확장해가는 스피노자 철학은 이후 그의 저서와 근대 철학사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뿐만 아니라《에티카》에 편중된 국내의 스피노자 연구 경향을 고려할 때 이 책은《에티카》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스피노자 사상의 정립 지점을 확인하게 해줄 것이다.
2. 신의 ‘실존’에서 신의 ‘관념’으로
신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과 인식론, 실체 개념, 지식의 정당화에 대한 데카르트의 사상은 근대 철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스피노자 역시 그의 사상을 데카르트에서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사상이 지닌 난점들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독창적 사상을 형성해갔다. 즉 데카르트의 초월적 신 존재 개념이 안고 있는 세계 개입의 문제, 정신과 육체의 구분 문제, 자유 의지의 문제를 풀기 위해 스피노자는 철저하게 자연 법칙 안에 있는, 내적 원인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 개념을 제시한다. 스피노자는 자립적 존재로서의 실체라는 데카르트 개념을 받아들여 신을 실체로 간주하지만 신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이 철저하게 자연 법칙을 통해 세계에 개입한다고 보며 이런 개입 방식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계를 초월해 있는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인 원인으로 존재한다. (이 책은 이러한 스피노자 핵심 사유의 초기 발생 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스피노자는 이 책에서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적 원리를 정의, 공리, 정리를 사용해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하는 과정에 따라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과 순환 논증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데카르트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했지만 외부의 신, 즉 자신에서 연역할 수 없는 신의 관념과 만남으로써 오히려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확신마저 흔들리게 된다. 나의 모든 원인이 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신의 ‘실존’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관념’의 문제로 전환해 우리 자신이 신에 대한 확실한 관념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 인식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문제의 중심이 ‘우리가 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서 ‘우리가 신의 관념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로 옮겨 간 것이다. 우리 자신이 신의 관념을 형성해냄으로써 신의 관념은 더 이상 초월적 타자로서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내는 가장 완전한 관념이 된다.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또는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1부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평적 또는 비판적 해설을 담고 있다. 전반부〈서론〉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코기토 명제를 발견하는 과정을, 뒷부분은 스피노자 자신이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과 순환 논증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지는〈기하학적 증명〉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하는 부분이다. 이런 방식은 본디 데카르트가《성찰》의〈기하학적 논증〉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스피노자는 이것을 텍스트로 삼아 재구성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특히 뒷부분에서 스피노자는 ‘참된 방법’을 신 증명의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 입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후에《지성개선론》에서 완성된 형태로 드러난다. 스피노자의 방법에 대한 탐구는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인 베이컨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스피노자는《지성개선론》에서 명석 판명한 관념은 모두 참이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는데 이런 입장이《데카르트 철학의 원리》에서도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스피노자는 탐구 방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완전한 관념에서 시작해야 하고 그 참된 관념의 형상은 지성의 본성 자체에 의존해 있음을 보여준다.
4. 형이상학 반성―《에티카》의 질문에 답하다
국내의 스피노자 연구는《에티카》에 치중되어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어떻게 신의 관념으로부터 탐구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참된 관념이나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와 같은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한 물음은《에티카》 안에서는 해명되지 않는다.《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는 이런 질문에 해답을 제시해준다. 부록 형식의〈형이상학 반성〉에서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핵심 사유로 재배치될 사상이 누구로부터 전승된 것인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는 데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형이상학 반성〉에서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이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들, 신과 그 속성 그리고 인간의 정신에 관한 물음에 답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인 ‘속성’과 ‘양태’를 통해 존재자를 정의하고 신의 속성들을 드러낸다. 속성이란 실체의 본질로서 신의 순수한 역량이 표현되는 것의 의미하고 양태란 단일한 실체인 신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신은 무한한 속성으로 구성되고 양태로 나타난 개별자는 속성을 통해 신의 본질을 표현한다. 인간은 무한한 신과 달리 유한한 양태로 신의 본질을 표현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유와 연장, 즉 생각함과 일정 공간을 차지하는 크기를 말한다. 스피노자의 이런 독특한 사유 방식은《에티카》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형이상학 반성〉을 포함해 스피노자의 이 초기 저작은 그의 사상의 핵심에 다가가는 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다.
5. 지은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접한 스콜라 철학과 데카르트의 철학과의 만남은 스피노자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히브리어와 유대?아랍 신학을 공부했으나 신이 육체가 없다는 점, 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 영혼이 불멸한다는 점 등을 뒷받침할 근거가 성서에는 없다고 주장해 유대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이후 스피노자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철학을 가르쳤지만, 한편으로 친구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은밀히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나갔다. 당대의 새로운 철학이었던 데카르트의 사상을 기하학적 방식으로 해설한《데카르트 철학의 원리》(1663)는 스피노자가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한 유일한 책이며《신학-정치론》(1670)은 익명으로 출간했으나 저자가 밝혀지면서 금서가 되기도 했다. 그밖에《지성개선론》,《에티카》,《정치론》 등은 그의 사후《유고집》(1677)을 통해 출간되었고《신과 인간과 그의 행복에 관한 소고》는 1852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6. 옮긴이 양진호는 대학에서 철학과 사학을 공부했고 칸트의 선험철학과 존재론의 관계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문예아카데미’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적인 시민교육을 시도했다. 그 후 광주로 건너가 철학 공부를 이어가면서 ‘라틴어번역공방’을 결성해 활동했고, 독일 미시오 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아헨, 베를린에서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번역 공방 활동과 함께 유럽 근대 철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스피노자의 《데카르트 철학원리》(1663) 연구 (1) : 〈서론〉에서 ‘신 증명’과 ‘순환논증’의 문제〉,〈방법적 회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 데카르트의 판단-의지 이론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