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 말하는 박완서 선생님. 영원한 현역 작가로 남았던 한국 문학의 신화. 아름다운 문장과 날선 시대정신과 푸근한 모성을 모두 보여준 작가. 선생님의 글에서 참으로 많은 아름다운 말들과 문장을 배웠고, 입버릇처럼 선생님의 담백하고 힘이 있으면서도 넘치거나 모자르지 않은 그 적절한 문장의 균형을 닮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선생님이 벌써 작고하신 지도 5년이 지났다. 엄마 냄새가 없어지는 게 싫어서 엄마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보존하려고 애쓰는 딸처럼 선생님의 글을 아껴가며 다시 읽기도 하던 중에 선생님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는 대담집이 나왔다니.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덜컥 읽기 시작했다. 왠지 한꺼번에 읽어치우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아끼는' 마음으로.

이 책에 실린 여러 대담에서 박완서 선생님은 자신의 글과 삶에 대해 역시나 따뜻하고 담백하게 이야기한다. 글만 읽어도 선생님의 그 웃는 모습이 자꾸 떠올라 더 그립고 아렸지만.. 선생님의 말을 접할 기회는 별로 없었기에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고 한 문장씩 정성들여서 읽었다.

"내 작품의 주인공은 발랄한 여대생보다는 흔히 한물간 여자, 즉 가정에 파묻혀 살며 평범하게 찌든 여편네"(p.14) 라고 하시던 선생님. 텅빈 서울에서 중공군 인민군 국군에 둘러쌓였던 시절을 증언하고 싶었다는 선생님.. 어떤 대담자는 선생님의 글에서 부끄러움과 오기를 느꼈고, 어떤 대담자는 따뜻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사늘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역시나 나만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아니었다!)

'노는 마당이 익숙지 않으면 글을 잘 쓸 수 없다.'(p.99)는 선생님의 말에서 유독 삶과 글이 가까웠던 선생님의 문학세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대담 속에서 어렵지 않은 문장을 추구하는 글쓰기 철학과 삶의 기억들 - 개성 박적골, 6.25전쟁, 아빠와 오빠의 이른 죽음, 그리고 아들과 남편을 연달아 떠나보낸 아픔-을 때론 무던하게, 때론 소녀처럼 생기발랄하게, 때론 따뜻하게 들려주는 선생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중간 중간 꽤 젊은 선생님의 감각에 웃음짓기도 하고 (컴퓨터를 1990년대 초부터 사용하신 것이나, 영화에 관심이 아주 많으신 것 등) 선생님의 푸근한 일상이 느껴지는 부분에선 우리 할머니를 만난 것 같아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이 책을 읽으며 삶과 글의 일치에 대해 생각을 더 깊이 해보게 된다. 내 삶이 곧 글이 된다고 생각하니 오늘 하루도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축적된 경험에서 실을 뽑아먹는다"(p.196)는 박완서 선생님의 표현처럼, 지금 살고있는 이 시간이 내 글의 자산이 되리라 믿고 싶다.

자존감 높았던 문학 소녀, 전쟁의 상처를 가진 숙녀, 평범한 아내이자 주부, 푸근한 할머니.. 그 모든 삶의 과정을 겪고 오롯이 글로 녹여낸 선생님의 순진한 듯 초탈한 미소를 닮고 싶단 작은 소망이 꿈틀거린다. 내가 여든이 되었을 때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겐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여든이라는 나이. 아직 가늠해보거나 떠올려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내 바람은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