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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김시습 시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글쓴이
김시습 저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
출판일
2016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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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미지

김시습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강릉.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동봉, 벽산 등을 사용하였다. 선덕(宣德) 10년 을묘(乙卯: 세종 17년, 1435)에 서울 성균관 뒤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문자 이해 및 구사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여 장안의 화제였다. 태어나서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다섯 살 적에 세종이 궁궐 안으로 불러들이어 운자(韻字)를 불러 주고 삼각산시(三角山詩)를 짓게 하였다. 5세에 『대학』(大學)에 통달하고 글도 잘 지으니, 신동이라 불렀다.

김시습은 뒷날 어릴 적에 궁궐에 들어가 임금의 사랑을 받은 사실을 시를 통해 회고하곤 했다. 하지만 유년기의 천재성과 이로 인한 주변의 칭찬은 김시습의 삶을 불행한 쪽으로 몰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성은 비정상성과 통하고, 유년기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기 십상이며, 그 자질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과 비례하지 않는다. 뒷날 그는 친지와 이웃의 넘치는 칭찬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21세 때 삼각산 속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단종이 손위(遜位)하였다는 말을 듣자 문을 닫고서 나오지 아니한 지 3일 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 버리고 미친 듯 더러운 뒷간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도망하여 행적을 불문(佛門)에 붙이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었다. 미친 듯 시를 읊으며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비록 세상을 선문(禪門)에 도피하였다 하여도 불법을 받들지 아니하니 세상에서 미친 중으로 그를 지목하게 되었다.

정치적 격변기를 지나 1458년, 24세에 승려 행색으로 관서 여행을 떠났다. 이후 관동과 호남을 유람하고, 경주와 서울에 안착한 시기도 있지만 방랑자로 긴 세월을 보냈다. “매월이라 당(堂)에다 이름한 것은 금오 매월이란 뜻을 취한 것이다”고 한다. 쉰아홉 되던 해 봄날,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비 내리는 가운데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2,200여 편의 시와 함께 정치 견해를 밝힌 산문들이 『매월당집』에 실려 있고, 소설 『만복사의 윷놀이』, 『이생과 최랑』, 『부벽정의 달맞이』, 『꿈에 본 남염부주』, 『용궁의 상량 잔치』가 『금오신화』에 전한다.

책 소개

분야
“‘명성은 일찍부터 컸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했고, 마음은 유자(儒者)이면서 행적은 불자(佛子)이니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 것’으로 생각해 고의로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했다.”

1582년 이이(李珥, 1536∼1584)가 선조의 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의 한 구절이다. 심유적불(心儒迹佛) 네 글자에는 김시습의 숱한 방황과 깊은 고뇌가 모두 담겨 있다. 이이는 김시습의 일생을 자기모순과 자아 분열로 간파한 것이다. 김시습은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이자 시대의 이방인으로 일컬어지는데, 그 근본 원인은 세계와 마주하기 이전 스스로 자아의 분열을 이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종의 죽음은 여러 해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속이 흉흉하던 김시습에게 모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는 갑자기 승려가 되어 여행을 떠난다. 이후 김시습의 삶은 여행의 연속이었다. “반생 길 위를 집 삼아 보냈으니, 만수천산이 눈 아래 호사로워라(半生長以路爲家, 萬水千山眼底?).” 7년 정도의 여행 끝에 견문이 많아지고 지식은 단단해졌지만 몸은 무척 지쳤다. 지친 그를 편안하게 품어 준 곳이 경주, 즉 신라였다. 그는 여기서 7년의 긴 안식을 가진다.
1583년 간행된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본 ≪매월당집≫ 권12의 <유금오록>에는 106제 146수의 시가 실려 있다. 금오산에 거처를 두고 있던 시절에 지은 작품들이다.
전체 106제 146수의 시 중에서, 일부 추정을 포함하면 경주에 머물면서 경주의 풍물이나 생활을 읊은 시는 69제 100수다. 본서는 이중 63제 76수를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것이다. 경주에서 지은 시는 대부분 포함하되 연작시의 경우 일부만을 실었다. 1465년 한양에서 지은 <금오산을 그리며(憶故山)>(72)와 <시주받은 돈으로 모두 책을 사서 금오산으로 돌아가다(所??財 盡買圖書 還故山)>(73) 두 수는 당시 김시습의 금오산에 대한 애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뽑아 넣었다. 경주 시절 김시습은 폐허에서 신라를 거니는 시간 여행자였다. 그는 심신이 지친 몸으로 경주를 찾았고, 경주의 빈터와 허물어진 전각, 기운 탑과 훼손된 불상, 그 위에 서려 있는 먼 옛날의 사연들이 그 황량한 속을 어루만져 주었다. 김시습은 오랜만에 심신의 안식을 찾았고, 그 따스한 둥지에서 ≪금오신화≫가 태어났다. 경주를 찾는 이가 이 책을 들면, 550년 전 경주의 풍경과 그 속을 거니는 나그네와 이들 사이에서 빚어진 시경(詩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시습은 1435년 서울 성균관 북쪽에 있는 반궁리(泮宮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다. 친가 외가 모두 대단한 집안이 아니었다. 외가에서 자라면서 말을 배울 무렵부터 외조부에게서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 장안의 화제였다. 두 살 때 “난간 앞에 꽃 웃으나 소리 아니 들리고, 숲 아래 새 울지만 눈물 보기 어렵네(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 구절을 듣고는 병풍의 꽃과 새를 가리켰다거나, 다섯 살 때 자기를 보러 온 정승 허조(許稠, 1369∼1439)를 두고 “고목에 꽃이 피니 마음 늙지 않았다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지었다는 종류의 이야기가 여럿 전해 온다. 소년의 천재성은 궁궐 안에까지 들려왔고, 세종은 그를 불러 시험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천재성과 이로 인한 주변의 칭찬은 김시습의 삶을 불행한 쪽으로 몰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천재성은 비정상성과 통하고, 유년기의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퇴색하기 십상이며, 그 자질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과 비례하지 않는다. 김시습은 내성적이며 부끄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그는 친지와 이웃의 넘치는 칭찬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과거엔 실패했고 집안은 빈한했다. 유년기의 충만감은 일순 공허감으로 뒤바뀌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오래도록 치유되기 어려운 내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곧 재취했다. 평생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계기가 되었다. 18세 즈음에 혼인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단종의 선위와 세조의 즉위(1455),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와 사육신 등의 죽음(1456), 단종의 죽음(1457) 등 정치적 격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여러 문헌에는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58년, 24세의 김시습은 승려 행색으로 관서 여행을 떠났다. 평생의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관동과 호남을 유람하고, 서른 살 무렵에 경주에 안착한다.
37세(1471)에 경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주했다. 이듬해 수락산 동쪽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수락산 시절 김시습은 외부 활동과 교유를 자제하고 수행과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의 주요 불교 저술을 지었다. 이 시기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남효온(1454∼1492)이었다.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생육신으로 묶어 일컬었다. 47세에는 잠시 환속해 다시 결혼하고 부친의 제사를 지냈다. 잠시 공부와 시작(詩作)의 방향이 유교로 급격하게 쏠렸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락산에 터를 잡은 지 만 10년이 되는 1483년 봄, 49세의 김시습은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남효온이 지은 시에 따르면, 김시습은 육경(六經)과 역사서 등을 싣고 관동의 산수를 돌아다니다가 농토를 얻어 생계를 꾸릴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고 했다. 이후 10년 그의 발걸음은 춘천, 홍천, 인제, 양양, 강릉 등지를 지났다. 오봉산과 오대산과 설악산에 머물렀다. 바닷가에서 한 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늙어 갔다.
1493년, 죽음을 직감한 코끼리가 깊은 동굴을 찾아들 듯이, 이승을 떠날 때가 된 김시습은 백제로 향했다. 무량사(無量寺), 지금은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아늑하고 포근하며 부드러운 절집에서 그는 평생 방랑에 지친 영혼을 안식한다.

이승수는 역사의 숲속에 나 있는 문학의 길을 거니는, 사림문로(史林文路)의 산책자다. 경기도 광주에 살며 한양대 국어국문학과에 몸담고 있다. “모든 이론은 자서전의 편린”이라는 발레리의 말에 동의하며, “지리 공간은 역사의 자궁이자 가정”이라는 듀란트의 말을 좋아한다. 연개소문, 이항복, 유몽인, 김시습, 박엽, 조성기, 김창흡, 박세당, 이덕수, 박문수, 박제가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패수(浿水)와 송화강(松花江) 등 우리 역사와 관련한 북방의 여러 도시와 강과 길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거문고 줄 꽂아 놓고≫,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등의 저서를 펴낸 바 있다. 사마천, 김성탄, 박지원, 이상으로 이어지는 인터뷰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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