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제까지 소설의 전통이 쏟아낸 그 어떤 전형에도 귀속되지 않는, 문학·인문·예술·신경정신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시리 허스트베트만의 지적인 사유와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해리엇은 지성과 미적 감각을 겸비한 예술가이면서도 뉴욕의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는 미술상 남편과 결혼한 뒤로는 재능과 욕망을 철저히 억누르고 아내로, 남매의 어머니로 살아간다. ‘갈등’을 야기하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남편 때문에, 그녀가 주최하는 파티에서조차 미술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주장은 아예 침묵하거나, 아니면 가끔씩 자제심의 균열을 통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양 극단으로 드러날 뿐이다.
남편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해리엇은 맨해튼 예술계를 도망치듯 떠나 그녀만의 소우주에서 칩거한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의 자기 재현을 철저하게 진압해온 세계에 대한 쿠데타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불가능했던 가장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저자는 해리엇과 소통했던 18명의 화자를 내세워 해리엇의 내면, 그녀의 의식과 본질적 정체성을 탐색한다. 온 세계를 활활 불타오르게 만들 정도로 파괴적인 그녀의 삶과 작품은 그녀가 남긴 흔적들의 점을 연결해 맥락 속에 집어넣는 ‘편집자’라는 캐릭터의 노고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그 편집의 결과물인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 독자들의 해석을 통해 완성된다.
이 책은 소설에서 이 책을 기획한 ‘편집자’라는 화자의 서문을 필두로,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다른 화자의, 다른 시선의 텍스트가 동원되어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매우 지적이고 정교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