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어디로 가느냐. 아버지 어머니에게로 가는가. 그렇지 않으면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가. 허무맹랑한 생물이여. 아침 이슬과 더불어 맺어졌다가 사라지는 미물이여. 가련하기 짝이 없구나.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할 것도 많고, 후회할 것도 없는 생. 잔머리로 그려 봐야 무엇하리오. 남겨 놓아야 무엇 하리오.
무위무행. 흔적이란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 참으로 맹랑한 삶이 아니었는가. 나의 뒤를 따를 사람 누가 있는가. 나의 살고 간 표시, 그것 남겨 무엇하리오. 겨울에 눈에 덮였던 노방초가 고개를 내민다. 살았다고 자세를 드러내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아내가 글 써주겠다고 열심이다. 부질없는 소리. 모두가 쪼들어간다. 그나마도 생동할 기운이 모두 떨어져 간다.
---‘계훈제 선생의 일기 중에서’(1998.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