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간사한 여우에게 홀리신 것이옵니다. 잊으소서. 요사스럽고 사람을 홀리는 간사한 여우에게 홀리신 것이니.”
인간 세상에 발을 디딘 여우, 려호. 여우인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먼저 다가와준 남자, 은헌국의 왕 정이. 여우여도 상관없으니 가약을 맺자던 그였지만 려는 왕궁을 떠나야만 했다.
이후 ‘수라’라는 이름을 가진 기녀가 된 려를 찾은 정. 하지만 수라는 그를 외면하는데…….
“이 기억은 이리도 선연하여 내 일생을 쫓는데, 너는 내가 홀리었다 말하는구나.”
십 수 년간 꾹꾹 담아두었던 눈물은 말라 사라졌다. 혼잣말 같은 그 음성은 허공에 흩어졌다.
“내 진정, 여우에게 홀린 것인가?”
바람에 흘러드는 붉은 꽃잎은, 그날의 환앙루마냥 아름답기만 한데.
“내 이 마음이, 진정으로 거짓이란 말이냐?”
그날 내 곁에 있던 여인은 더 이상 내게는 없구나.
2. 작가 소개
신여리
은위, 돌시아니 등의 필명으로 웹소설 작가 활동 중.
누군가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은, 그러나 게으른 아가씨.
무더운 7월의 첫째날 태어난 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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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작
물의 자흔을 쫓는다(완전판)
수라화(개정판)
가시나무 우는 성 1부
바라연
▣ 출간 예정작
마리포사 mariposa
이매魑魅
3. 미리 보기
“방금 그것은……. 지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서요(鼠妖)입니다. 오랜 시간 살아남은 쥐 요괴이온데, 밤에 자른 손톱을 먹고 그것의 형상으로 둔갑하여 필멸자의 눈을 속이는 달갑지 않은 장난질을 치는 놈입니다. 감히 저로 둔갑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으니 저의 불찰입니다.”
“……하나 그것이 내 이름을…….”
수라의 표정이 차차 가라앉았다.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 낯빛에 정 또한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손톱 주인의 기억마저 고스란히 읽어내는 요물이니,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아마 제 기억과 그 요물의 기억이 혼재되어 스스로가 무엇을 지껄이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차분하고도 나긋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음성에 담긴 주저함을 읽어내지 못할 정이 아니었다. 아무리 취기가 올랐더라도, 그녀와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지기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수라의 말에 피가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 서요란 것이 한 말이, 네 마음인 것이냐?”
“글쎄요. 그 요망한 쥐새끼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의 기억을 훔쳐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팔뚝을 조심스레 움켜쥔 정은 가닥 같은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애절하게 말했다.
“나 또한 너와 같은 마음이었다. 내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려야.”
수라가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비껴 돌렸다. 그 쥐새끼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하필이면 그 새앙쥐가 제 손톱을 먹고 정을 만났으니, 새앙쥐 또한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 줄줄 눈물을 흘려대고 있었으니 알 만하다. 다만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해서는 엄중히 치죄할 요량이었다. 자신이 꾹꾹 참아 눌렀던 것들을 일시에 터뜨려버린 녀석이니, 원망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네 이름을 듣고 바로 너임을 알았다.”
이름이 빌미가 되었다면, 그런 것일 터다.
그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 자락도 놓고 있지 않았다면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옥좌에 오른 그가, 일개 기생이 된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것이 의외라면 의외였던 것뿐.
처음 그가 이 기루에 신하들을 대동하여 찾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니. 그리하여 도망치듯 화안루를 떠났음에 사람들은 자신이 왕조차도 홀대하는 콧대 높은 기생이라 칭송하였다. 썩어 들어간 제 속은 그것이 아님에도 그들에겐 그리 보였으리라.
“인간의 기억은 금세 지워진다 들었습니다.”
“지워낼 수 없어 늘 널 그렸다. 너로구나. 드디어 네가 나타났구나. 어찌하여 기생이 된 것이냐? 어찌하여 스스로를 이리 낮춘 것이냐?”
“……이년 사람이 아님에도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에 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그녀와 이리 이야길 나눌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그를 압박했다.
“너와 가례를 치르고 싶다 하였던 내 마음은 여전하다.”
“후실이라도 되길 바라시는 겁니까? 재간택이 코앞이라 들었습니다. 듣는 귀는 여기도 있습니다.”
수라는 제 잔에 술을 따르며 시선을 피했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아직도 흘리지 못한 눈물이 남아 있는 것일까 힘없는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너와 가례를 올리고 싶다, 려야.」
몹시도 기뻐했다. 안될 것을 알았지만 그 마음만으로도 사랑스러워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가 건넸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이다지도 행복한 일이었구나 알게 해주었다. 그가, 자신보다도 소중했다.
“모두가 미천하다 손가락질하는 기생년 궐 안으로 들이고 싶어 그 오랜 시간 화안루 앞에 서 계셨나이까?”
“한동안…… 네가 사라지고 나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술을 따르던 여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영빈왕, 현오. 그 인품 훌륭하던 사내를 떠올렸다. 아마 정은 기억하지 못할 그 많은 일들은 그로 인해 함구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잊힌 모양이었다. 수라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붙잡은 정의 손을 천천히 떨쳐냈다.
“…….”
“내 어마마마가 너를 쫓아내려는 것을 알고도 내 일어날 힘이 없어 말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내 한이 되었다.”
수라의 갈색 눈동자에, 간절한 사내가 맺혔다.
“병석에서 일어나 너를 찾았지만 이미 너는 자취조차 사라진 후였다. 너를 기다렸다. 매일 너를 내 안에 그렸다. 네 얼굴이 떠오르고, 네 웃음이 떠오르고, 내 마음이 너로 가득하였다. 내 어찌 너를 그리도 맥없이 놓쳐버린 것인지…….”
그 그리움이, 오직 당신만의 것이었겠습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의 얼굴에 찬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인을 품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정이 멈칫했다. 마음엔 오직 이 여인만이 가득하여 다른 여인은 눈에 차지도 않았는데, 그를 몰라줌에 야속한 원망까지 들었다.
“려호(麗狐).”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쇤네는 수라라 합니다.”
“……수라.”
“정이 하였던 말입니다. 늪에 빠지는 것 같다 수라라 하시었지요.”
자신을 밀어내는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은 그녀의 버선발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푸른 치맛자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리도 잔인하게 변하였는가. 어째서 내게 이러느냐. 너도 날 그려왔음을 아는데, 어째서 이리 상처뿐인 말을 내뱉는 것이냐. 소리치고 싶었지만 꺽꺽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눈물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내…… 다 잘못 하였으니, 나를 미워하여 밀어내지 마라. 려야……. 다 내가 부족하여 너를 잃었던 것이니……. 나를 좀 용서해다오.”
수라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젖은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치맛자락에 매달려 울고 있는 사내를 보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미 무너진 가슴, 무너지고, 또 무너져 남은 것도 없는 가슴이 또다시. 이 그리움의 바닥이 어디에 있는지, 존재하기는 하는지 이젠 그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어릴 적에도 제게 안겨 이리 울었던 사내는, 여전히 그날처럼 울고 있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기분에 눈물이 왈칵 치미는 것을 느낀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애써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려야. 나를 버리지 마라. 나와 함께 궐에 가자. 이번엔 내가 널 지켜줄 테니.”
“싫습니다.”
“……려야, 이제 나도 궐도 모두 싫어졌느냐?”
정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물었다.
수라는 그의 손에 시선을 둔 채 침묵했다. 그녀의 입술이 슬픔을 베어 문 듯 서글프게 다물렸다. 어찌 그곳을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궐. 그날의 따뜻하던 기억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인세에 내려온 지 어언 열다섯 해.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을, 여우인 것을 알고도 사랑해주었던 좋은 사람들이 있던 아름답고 고명하던 궐내의 풍경은 아직도 오늘 일인 양 눈에 선한데.
그녀와 정은 봄이 되면 돋아나는 새순을 함께 보며 자랐다. 여름이면 피어나는 환앙루의 붉은 꽃을 함께 즐겼고, 가을이면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 위에 누워 드높았던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았고, 겨울이면 피어나는 동백꽃을 서로 머리에 얹어주며 즐거워했다. 그곳은 낙원이었다.
“어찌 잊겠습니까.”
정이 그들 사이에 놓인 주안상을 치우고 수라에게 가까이로 다가갔다. 말 한마디에 금세 헛된 희망에 빠지는 청년을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너와 함께 있던 궐을, 그 시절을 잊지 못했다.”
정이 천천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두려움에 잠긴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맞닿았다. 그녀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따뜻하게 그녀를 눌러오는 그의 입술이 조금 더 과감하게 그녀의 입술을 핥듯 물었다가 놓았다. 정은 가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참아 누르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혀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헤맸다. 마음 찾지 못해 떠도는 방랑자처럼, 그리도 절박하게.
수라는 일렁이는 가슴을 그대로 놓아둔 채로 떨리는 손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끝내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스스로 입맞춤을 멈추었다.
“려야…….”
수라는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그리워한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일 뿐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는 치죄 받아 마땅하나, 그들은 지난 추억을 안타까이 여기어 그녀를 풀어주었다. 대가라기엔 뭣하지만 자신은 영빈왕 현오(賢梧), 그리고 대비 윤 씨와 약조하였다. 병석에 누워 있던 정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니 이리도 안타깝게 구는 것뿐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말라버린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수라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정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사무친 외로움과 끝날 줄 모르는 슬픔 뒤섞인 사내의 시선이 그녀의 뺨에, 입술에 머물렀다. 붉은 등불에 비친 그 얼굴은 너무나도 하얗고, 너무나도 고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라는 천천히 자신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여우에게 홀리신 것이 딱하니. 제 비록 창기는 아니나 원하신다면 이 한 몸 강신왕께 헌상하겠습니다.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기생이 사내를 받는 게 뭐 이상한 일이라고.」
겸의 음성이 되새김질됨과 동시에 정의 낯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지고지순한 마음 하나만으로 그녀를 찾았는데, 어찌 저리 잔인한 말을 한단 말인가. 굳어진 정의 왼뺨으로, 굵은 눈물 한 줄기가 떨어졌다. 그가 눈을 부릅뜨며 수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짐짓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보거라.”
“비록 이 미천한 몸 창기는 아니나, 은헌의 백성으로서 원하신다면 이 한 몸 강신왕께 바친다 하였습니다.”
주저 없는 그녀의 대답에 손목을 움켜쥔 정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분노를 참지 못하여 덜덜 떨리는 그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놓아주십시오.”
“그런 것을 위해 너를 찾은 것이 아니다. 네가 어찌 내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면 소문처럼 진정 남색에 취하셨나이까?”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부러뜨릴 듯 움켜쥔 정의 손을 잠시 눈을 움직여 바라보던 수라가 짝 소리가 나게 그의 손을 떨쳐냈다. 여전히 충격과 분노로 일그러진 정의 얼굴을 흘긴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과연, 인간은 어리석다지요. 당신께서도 어리석으십니다.”
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간사한 여우에게 홀리신 것이옵니다. 그러니 이제 잊으소서.”
“네가 지금 내게 뭐라 하였느냐?”
“요사스럽고 사람을 홀리는 간사한 여우에게 홀리신 것이니 은애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네가 지금 나를…….”
“이년의 몸도 필요 없다 하시고, 미주에는 손조차 대지 않으시니 쇤네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켜 문 너머로 사라졌다.
정은 멍하니 돌아간 여인의 자취를 시선으로 좇았다.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창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눈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웃음은 기괴했다. 어깨가 떨리고, 가슴이 미어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것은 추억을 그리는 그리움인가, 보답 받지 못한 연심으로 인한 슬픔인가.
넋 빠진 희한한 상태의 사내를 바라보던 창기들과 기부들이 고갤 갸웃했다. 입도 대지 않은 술잔. 새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창기들이 자릴 잡고 앉았다.
거문고를 타고, 제멋대로 가무를 췄다. 오늘도 수라화는 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마저 접대할 뿐이다.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취기가 올라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비척비척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화안루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