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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광시곡 3
글쓴이
이리리 저
출판사
가하
출판일
2016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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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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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리

좋아하는 것 - 해피 엔딩, 동족을 제외한 동물, 지오반니 갈리 초콜릿, 브뤼셀
싫어하는 것 - 새드 엔딩, 동물을 싫어하는 동족(인간만 살라고 만들어진 지구가 아닙니다), 서울의 바뀐 버스 노선(불가사의 수준, 땅 속 세상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멍*부.

『현향기』, 『연의 바다』, 『광시곡』, 『마녀의 정원』, 『일월』, 『영원의 미로(공저)』를 출간했다.

책 소개

분야로맨스
1. 책 소개

“알렉산드르를 만나려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긴 해요. 그 사람과 결혼 생활은 제가 죽을힘을 다해 어쩌다 한번 완벽에 가깝게 연주했을 때만 느끼던 희열이 늘 가득했어요. 그걸 되찾고 싶습니다.”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두 사람. 하지만 조선에 돌아간 후에도 예린의 마음에는 알렉산드르에 대한 믿음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요시히로는 예린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알렉산드르의 비밀을 털어놓고, 예린이 잠시 흔들리는 사이 요시히로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끝을 향해 가는 전쟁 상황 속에서 예린은 생존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그 사이 광복의 소식이 전해진다…….

광복.
8월 정오의 태양보다 더 뜨끈한 열기가 몸속을 타고 돌았다. 그리고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한여름에 웬 아지랑이가 보이는지. 아릿한 시야를 맑게 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던 예린은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그제야 느꼈다.
주책없이 눈물을 보인 게 창피해 얼른 손등으로 볼을 훔쳤지만 놀랍게도 마주 앉은 가족들의 얼굴도 모두 젖어 있었다. 입 밖에 내면 꿈처럼 찾아온 이 순간이 신기루처럼 흩어질까 봐 감히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남의 손을 갖다 붙인 것처럼 뻣뻣한 오른손을 주무르면서 예린은 알렉산드르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하늘을 올려봤다.
‘이제 당신과 만날 수 있겠군요.’

2. 작가 소개

이리리

좋아하는 것 해피 엔딩, 동족을 제외한 동물, 지오반니 갈리 초콜릿, 브뤼셀
싫어하는 것 새드 엔딩, 동물을 싫어하는 동족(인간만 살라고 만들어진 지구가 아닙니다), 서울의 바뀐 버스 노선(불가사의 수준. 땅속 세상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멍*부

▣ 출간작 : 현향기, 연의 바다, 광시곡, 마녀의 정원, 일월

3. 미리 보기

오늘 정오 방송에서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라는 벽보에 예린의 가족은 모두 대청에 놓인 라디오 앞에 모여 있었다.
군가를 배경으로 필사 항전, 전원 옥쇄를 외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나와야 당연한데 이상하게 오늘은 잔잔하고 비장한 음악만이 흘렀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천황의 옥음 방송이 있을 거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라디오에선 모두 기립하여 예의를 취하라고 했지만 예린의 가족 중 누구도 꿈쩍하지 않았다.
“천황이?”
“아니 일본 왕이 라디오에 왜 나온단 말이냐?”
하늘의 신인 양 사진조차도 제대로 올려보지 못하게 하던 히로히토 왕이 직접 라디오에다 대고 말을 하다니. 믿을 수 없는 전개에 예린의 가족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의도를 놓고 왈가왈부할 새도 없이 라디오에선 가늘고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남자의 음성이 지지직거리는 전파음과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건 멀뚱멀뚱 라디오를 바라보고 있는 예린의 가족이나, 천황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황송함에 납작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란 걸 인정하는 마당에도 일본왕은 극소수만이 알아듣는 왕실 언어로 떠들어 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은 소위 ‘옥음 방송’이 끝난 직후 아나운서가 울먹이며 ‘통역’해준 다음에서였다. 일본왕은 끝까지 항복이나 패배란 단어를 뱉지 않았지만 아나운서의 요점은 간단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처럼 멀뚱멀뚱 그들은 서로를 마주만 봤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단어 하나가 떠오르면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마취가 풀리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덩어리가 심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광복.
8월 정오의 태양보다 더 뜨끈한 열기가 몸속을 타고 돌았다. 그리고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한여름에 웬 아지랑이가 보이는지. 아릿한 시야를 맑게 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던 예린은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그제야 느꼈다.
주책없이 눈물을 보인 게 창피해 얼른 손등으로 볼을 훔쳤지만 놀랍게도 마주 앉은 가족들의 얼굴도 모두 젖어 있었다. 입 밖에 내면 꿈처럼 찾아온 이 순간이 신기루처럼 흩어질까 봐 감히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남의 손을 갖다 붙인 것처럼 뻣뻣한 오른손을 주무르면서 예린은 알렉산드르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하늘을 올려봤다.
‘이제 당신과 만날 수 있겠군요.’

세상에 다시없는 노랫가락처럼 들리는 아나운서의 침통한 음성을 계속 들으며 예린의 가족은 그렇게 해방을 맞았다.
사실 이날 해방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소수였다. 라디오가 없거나 일본글을 읽지 못하는 대다수 조선 사람들이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실감한 것은 다음날부터였다.
8월 16일 휘문 중학교 운동장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조선 독립을 알리는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 이 사자후를 들은 사람들이 돌아가 이 소식을 전하고, 같은 날 오후 부위원장 안재홍이 라디오로 몇 년 만에 조선어로 방송 연설을 하면서 조선인들도 이 감격적인 소식을 알게 됐다. 서대문을 비롯한 각 형무소에 갇힌 정치범들이 석방되고 전국에 태극기의 물결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던 해방을 조선인들은 만끽했다.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총독부와 조선군 사령부에선 그동안 저지른 각종 만행의 증거를 없애느라 시커먼 연기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제 식민지가 아닌 땅을 빠져 나가려는 일본인들의 아비규환이 시작됐다.
일본에 기대 영화를 누리던 조선인들도 바로 며칠 전까지 자신이 괴롭히던 동족들에게 당할 보복이 두려워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8월 15일 이후 한동안 관공서와 경찰서에 출근을 하는 사람은 열에 두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예린의 가족도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는 집단에 속해 있었다. 예린을 부역에서 빼기 위해서였지만 세상에서 볼 때 현석은 막대한 군자금을 헌납한 친일 재산가였고 그의 딸은 일본군 장성과 약혼한 사이였다.
1930년대 후반까지 암암리에 이뤄졌던 독립운동에 대한 자금 지원과, 현석이 두루두루 쌓아 놓은 인덕 덕분에 주변에서 대 놓고 핍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일파 처단을 부르짖는 열혈 청년들이 언제 고려 약방을 응징하러 올지 몰랐다. 만약을 대비해 여자와 아이들은 순덕의 병원에 피신하고 남자들만 집에 남아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런데 구원은 늘 그렇듯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대만민국이란 국호로 주체적으로 건국을 준비하려던 조선인의 뜻과 달리 38선 이남엔 미국이, 이북에 소련이 들어왔다.
조선인들에겐 불행히도 일본군 무장해제를 이유로 진주한 미국과 소련 어느 쪽도 한반도의 과거나 미래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순조로운 무장 해제와 통치. 그걸 위해 미국은 치안과 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기용하려 했다. 그 경험자들은 다름 아닌 일제 치하 때 순사나 공무원을 했던, 조선인 입장에서는 일제의 앞잡이들. 인생의 대부분을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을 위해 힘썼던 사람들에겐 피눈물이 날 일이었지만 그런 미묘한 민족 내부의 문제는 군정의 관심 밖에 있었다. 덕분에 일본의 그늘에서 같은 민족을 괴롭혔던 자들은 이제 미국의 비호 아래 같은 일을 할 권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미국의 신발 바닥도 핥을 자세가 되어 있는 그 열성적인 협조자들도 해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의사소통. 조선어도 일본어도 모르고 또 알 생각도 전혀 없는 미군들은 통역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레이더에 영국 유학 경력이 있는 정석이 포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말만 통해도 감지덕지할 판에 그들보다 더 세련되고 교양 있는 영어에다 옥스퍼드 유학 경력. 능력 미달의 통역과 씨름하는 데 지친 미군정 간부들에게 정석은 하늘에서 떨어진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정석은 새로운 지배 세력의 중심부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정석 덕분에 미군이 일본인들에게 압수한 약품들을 불하받아 가장 먼저 정상화가 된 고려 약방은 해방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 성업을 누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제 자리를 찾아간다고 모두가 믿고 있던 어느 날. 예린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아버지와 숙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불란서로 가겠습니다.”
뜬금없는 선언에 현석과 정석이 기겁을 하고 예린을 바라봤다.
남아 있는 일본인들도 꽁지가 빠져라 귀환선을 타고 있는 마당에 요시히로가 조선에 돌아올 리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혼약은 파기되었고, 현석도 내키지 않는 혼사에 딸을 밀어 넣는다는 죄책감에서 해방이 되었다.
이제 전쟁통에 죽지만 않았다면 사위가 예린을 데리러 오리라. 모처럼 다리를 쭉 뻗고 살던 현석은 예린의 성급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왜 그리 설치니.”
사정 모르는 현석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요시히로가 칼을 꽂듯 내던진 알렉산드르의 결혼과 아이 소식은 예린만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었다. 처음엔 충격을 이기지 못해 그녀는 한참 동안 앓았다. 두 번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오른손의 부상마저도 알렉산드르의 배신에 비길 순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의심과 사실이라면 그를 죽이고 싶다는 복수심이 그녀를 몇 번이나 까무러치게 했다.
내막 모르는 부모는 손을 다친 충격 때문이라고 안쓰러워했지만 그녀의 긴 병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만약 예카테리나란 이름만 아니었다면 중상모략이라고 가볍게 무시했을 거였다. 그렇지만 그건 알렉산드르의 은인이고 그가 사랑했던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아무리 요시히로라고 해도 그것까지 알고 갖다 붙여 얘기를 날조할 순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긴 갈등을 끝낸 예린은 자기 눈으로 모든 걸 확인하고, 알렉산드르에게 자초지종을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제 그를 찾아가 모든 걸 확인할 시간이었다. 밤마다 흐느낌을 참느라 입술 안쪽에 피딱지가 떨어질 날이 없는 그런 기다림은 지금까지로 충분했다.
“5년을 넘게 기다렸어요. 아버지. 그 사람이 무슨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고 있다면 제가 가야지요. 허락해주세요.”
“내가 허락을 한다고 쳐도 지금 구라파로 나가는 게 어디 옆 동네 마실 가는 것처럼 간단한 줄 아느냐.”
믿는 구석이 있기에 저지른 참이라 예린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숙부를 응시했다.
“그래서 두 분이 함께 계신 지금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숙부님 도와주세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몸을 슬쩍 돌리며 현석의 눈치만 보는 정석 앞에 예린은 바싹 다가앉았다.
“도와주실 분은 숙부님밖에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구라파에 갈 수 있는 여행 허가증을 받도록 군정에 힘을 좀 써주세요.”
“요즘 한다하는 집에서 다들 자식들을 미국에 보내려고 돈 보따리를 싸들고 와서 설쳐도 여행증이 안 나오는 판인데 미국도 아니고 유럽이라니.”
입을 딱 봉하고 있는 형의 태도를 반대라고 받아들인 정석은 도리질부터 쳤다. 그러나 조카 역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가장 고집스런 입매였다.
‘저것이 마음먹고 떼를 쓰기 시작하면 당해낼 장사가 없는데 어쩌나.’
끙끙거리는 그를 구원하듯 허공만 올려보던 현석이 입을 뗐다.
“만에 하나 구라파로 간다손 치자. 전쟁 끝에 그곳이 어찌 변했을지도 모르고 또 어딨는지도 모르는 네 남편을 어떻게 찾아 만나겠다는 거냐. 그리고 오스트리아란 곳은 패전국이라 들고 나는 게 자유롭지 못할 텐데 어떻게 거길 가겠다는 거냐?”
곰곰이 계산해 내지른 설득이었지만 예린을 설득하기엔 모자랐다. 기다렸다는 듯 대꾸가 나왔다.
“그래서 일단 불란서로 가겠다는 거예요. 그곳엔 알렉산드르의 양부도 계시고 도와줄 사람도 많습니다. 파리까지만 갈 수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현석과 정석 형제는 난감한 눈빛을 교환했다. 저렇게 대답이 술술 나오는 걸 보면 하루 이틀 생각한 궁리가 아니란 소리였다.
예린 말마따나 몇 년간 머물렀던 프랑스라면 도움을 줄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예린을 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안 된다.”
“왜 안 된다고만 하시는 건가요?”
현석도 딸 못지않게 사위가 찾아오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해외에 있는 동포나 망명해있던 우국지사들마저도 입국을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알면서도 문이 열리는 소리만 나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그는 사위가 찾아올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만약 알렉산드르가 죽었다면. 그 먼 곳에까지 간 예린의 기막힌 심정과 그 처지가 어떻게 될지.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면 기댈 수 있는 곳에서 당해야 했다. 예린을 빤히 쳐다보던 현석은 속에만 담아 놓던 걱정을 결국 토해냈다.
“구라파에서만 해도 셀 수도 없이 많이들 죽었다지 않니. 휴…… 이런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지만 만에 하나 네 남편이 그리 됐다면 어쩔 거냐. 의지가지도 없이 이역만리에서 어쩌려고?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다. 우편도 교통도 엉망이니 살아 있기만 하다면 늦더라도 찾아오거나 소식이 있을 게다. 좀 진중하게 기다려 보자.”
천분이라 믿었던 피아노마저 칠 수 없게 된 딸이었다. 이국땅에서 홀로 비보를 듣고 혹시라도 모진 마음을 먹을까 걱정을 놓을 수 없는 현석은 세게 도리질을 쳤다.
아버지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챈 예린의 눈이 흐려졌다. 그러나 예린은 알렉산드르가 살아 있다고 믿었다. 영혼까지 연결됐다고 믿는 연인을 가진 여자로서의 육감은 그가 죽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는 아버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숨을 가다듬으며 예린은 아버지가 납득할 만한 현실적인 근거를 내 놓았다.
“알렉산드르의 아버지는 가문의 대를 잇는 것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절대 목숨이 위험할 곳에 알렉산드르를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기만 하다면야 오죽 좋겠냐마는 그래도 예린아, 세상엔 불가항력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만약……, 그러면 그 만리타국에서 어쩔 셈이냐?”
“알렉산드르와 상관없이 불란서에 가면 학교에 돌아갈 생각입니다.”
“뭐라고?”
뜻밖의 진행에 현석과 정석이 놀라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젓가락질도 잘 못하는 오른 손으로 어떻게 피아노를 다시 치겠다는 것이지.
힘을 합쳐 협공을 가하던 두 사람이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 예린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 온 일인 것처럼 계획을 술술 풀어놨다.
“오랫동안 쉬긴 했지만 전쟁 때문이니 아마 재입학이 허용될 거예요. 피아노과로 돌아가는 건 이제 불가능이겠죠. 그래서 작곡과로 편입하려고 합니다.”
“작곡? 그 난파나 현석(현제명의 호)처럼 곡을 쓰겠다고?”
“예.”
듣고만 있던 정석은 형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자 얼른 도우려 나섰다.
“네가 하던 피아노와 작곡은 같은 음악이긴 하지만 많이 다르다. 더구나 공부를 손에 놓은 지도 한참이고 적지도 않은 나이에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 뒤나 따라 갈 수 있겠니?”
“할 수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 해서 할 거예요.”
“예린아, 그게…….”
다시 열기를 띄는 대화를 듣던 현석이 손을 들어 동생을 막더니 예린에게 물었다.
“네 서방을 찾아가기 위한 핑계는 아닌 거냐?”
“아닙니다.”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건 실상 충동적으로 나온 소리였다. 아버지의 반대와 걱정을 덜기 위해 설득할 거리를 찾다 튀어나온. 그러나 던져 놓고 보니 아버지를 설득하기에 이보다 좋은 핑계는 없었다. 남편에 대한 내밀한 감정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에게 고백하는 게 쑥스러웠지만 예린은 솔직담백하게 털어놨다.
“알렉산드르를 만나려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긴 해요. 그 사람과 결혼 생활은 제가 죽을힘을 다해 어쩌다 한번 완벽에 가깝게 연주했을 때만 느끼던 희열이 늘 가득했어요. 그걸 되찾고 싶습니다.”
예린은 알렉산드르의 배신을 전하던 요시히로의 음성을 떨쳐내려 애쓰며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
“만에 하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제가 무너지지 않을 힘이 필요합니다. 염치가 없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태산이라도 움직일 듯한 간절함이 가득한 애원. 그러나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석이 꿈쩍하지 않으니 정석 역시 뭐라 나설 수도 없었다. 단체로 망부석이 된 것처럼 세 사람은 꼼짝도 않고 앉아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예린과 눈싸움을 하던 현석이 천천히 정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힘을 쓰면 가능은 한 일이냐?”
‘결국은 또 이렇게 되는구나.’
정석은 고집이라면 빠지지 않는 현석을 매번 이기는 조카와, 힘든 용단을 내리는 형을 놀란 눈으로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나 현석이 턱없이 무르다 탓할 순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서씨 집안의 고명딸은 여자란 것 자체가 족쇄인 조선에 어울리지 않았다.
한 두어 세대 뒤에 이 땅이 변한 뒤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인력으로 세상을 바꿔줄 수는 없는 법. 10여 년 전 프랑스에 유학을 보낼 때처럼 예린이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가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엄청난 임무를 떠맡게 된 처지가 난감하면서도 예린이 과연 어디까지 해낼지 보고 싶다는 욕심도 뭉글뭉글 일었다.
‘우리 집에서 후대에 두고두고 이름을 남길 사람이 있다면 분명 이 아이일 것이다.’
누구를 통해 어디를 뚫어야 일이 풀릴지를 궁리하며 정석은 환해지다 못해 빛이 나는 것 같은 예린에게 짐짓 눈을 흘겼다.
“해봐야지요.”

미국도 아닌 프랑스로 가는 길. 그것은 예린이나 정석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난제였다. 그러나 아무데나 헛돈질을 하는 사람들과 달리 정석은 최소한 어디에 줄을 대야 하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미약하나마 군정에 연결된 그의 영향력과 아직 남아 있는 예린의 명성, 현석이 아낌없이 대주는 뒷돈을 최대한 활용해 정석은 간신히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모든 사람들에게 파란만장했던 1945년의 마지막 달. 마침내 예린은 인천을 출발해 미국으로 가는 수송선에 한 자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항구엔 습기 가득한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잿빛 하늘을 올려보며 이를 악물던 유씨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몸 건강히…… 빨리 돌아오너라.”
그러나 현석은 아내의 따뜻한 당부를 곧바로 잘라 버렸다.
“무슨 소리.”
과연 잘하는 짓인지. 아내나 주변 사람들 지청구대로 애초에 기를 확 꺾어 놨으면 팔자가 저리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꼬리를 무는 온갖 회의에 현석은 지난 밤 내내 눈 한 번 붙이지 못하고 뜰을 서성였다. 당장 지금이라도 주저앉히고 싶으면서도 일부러 더 모질게 굴었다.
“내가 지금까지 네게 안 된다고 한 적은 있어도 마지막이라고 한 적은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아비 도움을 받는 건 이게 끝이란 걸 명심해라. 가서 네 남편을 만나건 못 만나건 약조한 대로 네 살 길을 음악에서 꼭 찾고, 성취하기 전엔 절대 집에 돌아올 생각은 말아라.”
“에구머니! 여보!”
남편의 냉혹한 선언에 유씨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예린은 담담했다. 쇠 먹는 불가사리처럼 잊을 만하면 뭉칫돈을 와작와작 작살내는 시누이 뒤치다꺼리가 드디어 끝날 전망에 화색이 도는 올케, 그래도 혈육이니 애틋한 마음에 착잡한 오빠 장훈. 눈물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진 고모 순덕과 숙부 부부까지.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들과 아버지에게 예린은 깊이 몸을 숙였다.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오래 전 18세 소녀는 흥분으로 볼을 복사꽃빛으로 화사하니 물들이며 배에 올랐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소녀는 이 길이 찬란한 영광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 확신했다. 또래들이 꿈꾸는 사랑이나 연애는 그녀의 인생 계획에 아예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앞에 기다린 것은 피아노보다 더 사랑하게 된 남자였다.
이 배가 닿는 곳에 이번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한편으론 두려웠다.
아주 먼 훗날에야 돌아오게 될 땅. 배웅 나온 가족 중 몇몇은 지금이 마지막 만남이란 걸 모르는 채 예린은 점점 멀어지는 인천항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아쉬움과 설렘, 이전엔 없었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차곡차곡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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