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이 좁은 땅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난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1936년 도쿄 피어리스 학당을 가득 채운 피아노 선율, 그 사이를 흐르던 글루미 선데이. 망명한 러시아 귀족이자 오스트리아 장교 알렉산드르는 그곳에서 예린, 그리고 그녀의 피아노를 듣게 된다. 이후 유럽행 여객선에서 재회한 그 둘. 그리고 그 밤. 알렉산드르의 월광 아래 예린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조금 전까지 그녀의 것이었던 심장의 주인이 이제 영원히 바뀌었다는 걸 예린은 인정했다.
처음엔 충격으로 다가왔던 진실이 서서히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결정했다. 난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을 사랑할 거야. 그러자 죽기보다 싫었던 연주도 의미를 달리하며 다가왔다.
이 사람만으로 충분해. 최소한 알렉산드르는 내 연주를 들어주겠지.
월광을 칠 때처럼.
알렉산드르만을 위해서.
2. 작가 소개
이리리
좋아하는 것 해피 엔딩, 동족을 제외한 동물, 지오반니 갈리 초콜릿, 브뤼셀
싫어하는 것 새드 엔딩, 동물을 싫어하는 동족(인간만 살라고 만들어진 지구가 아닙니다), 서울의 바뀐 버스 노선(불가사의 수준. 땅속 세상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멍*부
▣ 출간작 : 현향기, 연의 바다, 광시곡, 마녀의 정원, 일월
3. 미리 보기
소리 하나 없는 채로 주변에서 난리가 나고 있건만 예린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모든 상황은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계획을 짤 때 노린 대로 내막을 아는 사람들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사치코가 그녀보다 더 뛰어나거나 최소한 비슷한 정도의 실력이기만 했어도 그녀는 납득했을 거였다. 하지만 사치코의 연주는 그녀가 볼 때 쇼팽에 대한 모독이었다.
당연히 내 것이어야 할 자리를 비겁하게 빼앗아 갔다면 되찾는 방법이 비열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치코에겐 마땅한 인과응보이다.
예린은 사색이 된 교장과 교사들. 지금 틀림없이 강당 문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울고 있을 사치코의 모습을 즐겁게 떠올렸다. 그 행복감은 힘이 되어 음악에 온전히 녹아들었다. 흥이 오른 그녀는 온 힘을 다해 클라이맥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광인 어머니와 달리 요시히로는 음악엔 거의 취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소녀의 연주가 비범한 수준이란 것을 감지했다. 조촐한 가정 파티에 초대되어 갈 때면 약속이나 한 듯 그 집 영양들이 등장해 들려 주던 예쁜 소품들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열기와 범상찮은 울림이 그녀의 연주엔 있었다.
‘재미있겠군.’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하던 사치코와의 약혼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자신을 싫은 자리에 끌고 온 원흉이라서 더욱 귀찮게 느꼈던 오스트리아 일행의 젊은 장교에게 고맙단 감정까지 들었다.
뭔가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는 너무나 속을 알 수 없어 전혀 호감이 가지 않던, 오스트리아 장교에게서 처음으로 감정이란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몰입이었다. 항상 반쯤 이 세상에서 발을 뺀 듯한 냉담함으로 무장한 젊은 장교에겐 목적도 야심도 없이 명령받은 귀찮은 의무를 때우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첫 만남부터 요시히로는 그가 지독한 무력감에 찌든 상태임을 간파했다.
혁명 때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착한, 황족의 피까지 섞인 명문 귀족이라는 출신 때문인지, 아니면 대다수 운 나쁜 러시아 귀족들과 달리 재산을 일찌감치 다 빼돌리는 데 성공해 샹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누리던 영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부 덕분인지 높지 않은 직급임에도 사절단의 고위 관료들조차 그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공식 일정과 상관없이 이 남자가 사적으로 초대되는 자리는 사실 사절단의 수석대표조차 접근할 수 없는, 일본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격조 높은 집단의 모임이었다. 그런 엄청난 대접에도 전혀 감동이 없는지 그의 심드렁함엔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겉멋만 잔뜩 든 오스트리아 장교들은 이 남자의 무심함을 절제된 귀족다움으로 착각하고 오히려 흉내 내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과 달리 가문의 후광을 업고 패기와 야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인간을 질색하는 요시히로는 이 장교를 내심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몸을 꼿꼿이 세우고 무대를 응시하는 오스트리아 장교에게선 나른한 권태는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요시히로는 오스트리아 남자의 시선이 집중된 무대 쪽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피날레를 향해 열정적으로 몰아치는 소녀를 응시했다.
소녀의 드레스는 어깨 쪽이 봉긋하게 부푼 것을 제외하고 차이나 칼라에, 금욕적일 정도로 장식 하나 없는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하게 흘러내리는 실루엣은 동양인치고는 큰 키와 약간 통통해서 육감적으로 보이는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데에 확실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옆에 앉은 장교의 관심이 소녀 개인에게라기보다는 그녀의 음악에 집중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주변 남자들의 번들거리는 욕망어린 시선을 감지하며 그는 소녀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어느 곳으로 감춰 버리고 싶단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자신의 독점욕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는 오랫동안 피해 왔던 결혼이라는 함정에 기꺼이, 더불어 가능한 빨리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저 탁월한 연주는 다른 사내들의 눈길을 받는 공공장소가 아니라 나와 가족들만의 것이 되겠지. 그 정도는 사내답게 용인해줄 수 있다.
그는 종이꽃 같은 사촌들이나 누이와 전혀 다른, 생생한 향기를 내뿜는 소녀와의 미래를 즐겁게 꿈꾸며 연주가 끝나자 의례적으로 박수를 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예린이 마지막 음을 누르고 건반에서 손을 뗀 순간 피어리스 학당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 터졌다. 대다수의 참석자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음악가가 왔을 때조차도 점잖은 박수와 절제된 환호가 고작인 일본 땅이었다. 그런데 콘서트홀도 아닌 졸업식장의 축하 연주에서 기립박수가 나온 것. 이건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난 소녀가 승리감이 가득한 미소를 띠고 몇 번이나 몸을 숙였다. 그러나 박수 소리는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앙코르를 요구하며 점점 더 높아지기만 했다. 그들의 갈채는 그녀가 다시 의자에 앉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처음 그녀가 등장했을 때 예의 바른 침묵과는 다른, 기대감 가득한 긴장감이 홀을 가득 메웠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정적 속에서 소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청중을 한번 응시했다. 그리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첫 음을 눌렀다.
아까와 달리 이번 연주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생소한 곡이었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어 어지간한 명곡들은 다 안다고 자부하는 인사들조차도 고개를 갸웃하며 저게 무슨 곡인지 의아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 의문도 잠시. 그들은 가볍고 발랄하면서도 독특한 멜로디에 빠져들어 저도 모르게 몸을 끄덕거리고 있었다.
소녀가 치는 곡은 변주곡인 듯 테마가 다양하게 반복되어 나타났다 변형되고 있었다. 음악에 푹 빠진 그들 중 누구도 소녀의 입가에 서린 우월감과 비웃음을 읽지 못했다.
다만 단 하나의 예외가 요시히로 옆에 앉은 젊은 오스트리아 장교였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설마?’ 하는 표정으로 피아노를 응시했다. 소녀의 연주가 계속되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곡의 절정으로 짐작되는 부분이 달할 즈음 웃음을 참느라 그는 몸까지 떨어댔다.
곡의 후반부 내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 당하던 장교는 마침내 소녀가 연주를 끝내고 다시 박수갈채에 휩싸이자 참았던 폭소를 터뜨렸다. 일본 땅에 나타난 천재 소녀의 등장에 감동하는 박수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 그는 홀로 배를 잡고 웃어댔다.
무례의 정도를 벗어난 태도에 요시히로가 참지 못하고 그를 차갑게 노려봤다.
〈무슨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리바노프 공?〉
리바노프란 남자는 외교적인 가면을 벗어던진 요시히로의 얼음장 같은 시선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박수갈채가 끝나갈 무렵에야 겨우 감정을 수습한 그는 아직도 웃음의 파동이 남은 시선을 요시히로에게 고정시켰다.
〈지금 그녀가 연주한 곡이 뭔지 정말 모르는 거요?〉
〈예?〉
느닷없는 질문에 요시히로가 잠시 말문이 막혀 머뭇거렸다.
호기심과 공연한 질문으로 약점을 잡히는 것이 싫어 갈등하는 요시히로를 가벼운 비웃음을 담고 응시하던 상대는 선심 쓰는 어투로 단어 하나를 툭 던졌다.
〈글루미 선데이.〉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국민들의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연주나 방송이 금지되고 있는 노래의 제목이 튀어나오자 요시히로는 펄쩍 뛰었다. 그가 아무리 음악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암암리에 유행하는 이 곡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몇 번 들었지만 지금 친 피아노곡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절대 아니라 부인하는 요시히로를 향해 리바노프란 남자는 우월감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아는 자의 여유로 그는 그답지 않은 친절함을 담아 찬찬히 설명했다.
〈오른손은 테마를 변형한 복잡한 멜로디로 교묘하게 감췄지만 왼손은 글루미 선데이를 코드만 바꿔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소. 축하합니다. 쓰쓰미 씨. 대단한 재능을 가진 약혼녀를 두셨군요.〉
말을 마친 그는 좀 전까지의 흥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 심드렁한 평소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무대 위의 소녀, 예린은 사색이 된 교사들과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공손히 몸을 숙인 다음 빨간 리본을 나풀거리며 여왕처럼 당당하게 무대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