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훈의 소설 『우리는 사랑의 그림자를 보았네』는 근친상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성 관계라는 문제는 서구의 문학에서 그리이스 로마 신화 이후 여러 이야기로 자주 등장해 왔다. 이런 사정은 동양도 마찬가지여서, 민담이나 괴담 속에 심심찮게 출현한다. 그만큼 이 테마는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원초적인 갈등을 다룬다고 할 수 있겠는데, 누구라도 피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휘말리기 쉬운 욕망이란 필연적으로 소설의 고전적인 테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설이 인간의 문제,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심층의 문제를 파고들려 하는 지적 모험이라 한다면 이런 터부에 대한 탐색이 고전의 세계 이후 진지한 작가들에 의해 끈질기게 다루어졌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우리 소설도 이런 터부를 다룰 수 있을 만큼 깊고 넓어진 것일까?
소설가 박충훈은 1945년 강원도 영월에서 출생하여 성장했으며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귀국하여 사업가로 성공한 그는 1989년 논픽션 「금마리 3·1운동 비사」를 에, 1990년 단편 「해후」를 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정력적인 글쓰기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십여 권의 저서를 출간한 중견 작가다.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들 속에는 순박한 농촌의 정서와 살벌한 도시의 욕망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지난 세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곳곳에서 드러냈던 난맥상의 한 뿌리인 것이다. 나아가서 이런 현상이 소설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소설 공간의 갈등과 긴장을 자연스럽게 고조시키게 된다. 이것은 개발 시대에 농촌에서 도시까지 온몸으로 구르며 살아온 작가의 삶과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동물적 재능이겠는데, 작가에게 있어서는 실로 탐스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갈등이 무엇인지 아는 작가가 이런 테마에 후각을 곤두세웠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동안 우리 소설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사랑의 그림자를 보았네』와 같은 힘에 겨운 테마를 비껴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지의 깔끔한 조율을 통해 삶의 편린을 반짝 드러낸다는 단편 미학의 정수를 일변도로 추구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여기 충분히 수련을 쌓은 한 중견 작가가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 실험만으로도 주목할만하지만 이 작품의 완성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의 그림자를 보았네』가 채택한 방식은 소설의 정공법이다. 심리묘사는 집요하다. 탄탄한 플롯으로 독자를 쉴새 없이 추리하도록 만든다.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어휘는 풍부하다. 인물과 갈등이 충분히 어우러져서 생동감을 준다. 이 때문에 자칫하면 무리하게 억지로 꾸며낸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던 극단적인 내용이 슬픈 사랑의 이야기로 균형 있게 마무리되었다. 이로부터, 결코 쉽게 다룰 수 없는 터부에 관한 이야기가 웅숭깊게 넓이와 깊이를 획득했다.
결국 이런 획득은 소설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인간에의 탐구가 이루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런 소회를 피력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성폭력을 다루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근친상간을 다루고자 했던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드러내고 싶었다.
사랑이 아름답듯이 성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성에서 추잡한 성의 노예로 변질되는 것은 백지 한 장 차이다. 사랑과 성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양면성을 가진 사랑과 성을 인간이 '어떻게 다루어 가고', '어떻게 지배를 당하느냐' 하는 문제를 흑백으로 가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인간성에 관한 문제이고, 인간의 본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기에 그러하다.
인간에의 탐구를 외과의사의 메스로 하느냐, 목회자의 묵상 속에서냐, 시인의 노래로냐 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그 탐구자가 갖는 인간관에 달려 있겠다. 고통에 휘말린 주인공들에 대한 박충훈의 시선은 따스하다. 결국 그의 인간관은 긍정적이며 희망적이다.
비극적 관계로 잉태된 아이는 결국 탄생한다. 그것은 생을 마감한 그 아비의 슬픈 소망이기도 했고, 어미의 끈질긴 생명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또한 아이의 출생은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이 비극적인 남녀를 지켜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소설 말미에서 화자인 작가 최평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들 사촌 형제간의 심중이 이해가 되었다. 이들은 성적으로 한창 예민한 사춘기에 육감적이고 몸가짐까지 헤픈 숙모와 계모 밑에서 끊임없는 성충동을 느끼며 자랐던 것이다. 먹고살기 바빠 자식들이나 청소년들의 성교육에 무관심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이들 집안에서 일어난 그 일련의 사건을 이들만의 잘못으로 몰아붙이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가의 시선은 사회의 기막힌 왜곡과 그 왜곡의 희생자들을 단죄하기보다는 끌어안고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따뜻함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흡입력은 결말의 따듯함과 어우러지며 독자로 하여금 오래도록 진한 감동에 젖어들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