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은 언론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사회구조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무수히 많은 언로가 존재하고 있는 요즘 일반인들은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쉽게 알기가 어렵다. 이럴때 무수한 곁가지를 잘라내고 꼭 필요한 정보와 의견을 생성하는 '정론지'의 역할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퓰리처상'은 (물론 미국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언론인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영예이자 수상자의 행적이 이 사회에 굉장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의 반증이다.
헝가리 출신의 빈털터리 이민자로서 퓰리처는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믿을 만한 사람도, 든든한 재산도 없는 당시의 그에게 미국은 '꿈'이 아니고 '악몽'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과 열정이 있었다. 언론인으로서의 퓰리처는 우연한 기회에 탄생된다. 지역 신문에 글을 쓴 퓰리처를 눈여겨본 편집국장의 권유로 그는 정식 기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의 열정은 '상업성'과 '공공성' 양쪽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부유층이나 연예인의 사생활 등 스캔들이나 가십기사도 끊임없이 발굴 보도 하여 ‘황색언론’이라는 말을 탄생하게 한 것이 전자의 본보기라면, 정권 유지 차원에서 시행되는 감정적 애국주의 정책들을 강하게 비판하여 몇 차례의 전쟁을 막아내거나 부자들만을 위한 세법을 개정토록 한 것은 '사회의 공기'라는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결과였다.
한때, 언론사 세무조사로 인해 온 나라가 홍역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그 싸움은 '수면 밑의 오리발'처럼 아직도 진행중이지만, 쉽게 끝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현대인들은 신문없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신문을 어떻게 보느냐일 것인데, 엄연히 '상업지'인데도 '정론지'라 우기는 신문을 보기 전에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고 당당히 주장했던 퓰리처의 전기를 읽어보면 어렴풋하게나마 해답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9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도 때로는 돈키호테같고 때로는 마키아벨리 같기도 한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 있을 정도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