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츠는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도스토예프스키, 포크너, 헤밍웨이의 영향 아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첫 장편소설 『창공의 보라매』(1951)로 작가적 명성을 얻은 뒤 명쾌한 문체와 짙은 시대성을 기반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고독한 인간의 운명과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적응 문제, 권력과 대립된 인간 문제 등 보기 드물게 폭넓은 사회 상황을 담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 출간되자마자 독일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독일어 시간』(1968)은 권력과 예술의 갈등을 그린 소설로서 히틀러 집권 말기라는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에도 의미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199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와 함께 매년 독일어권의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된 렌츠가 말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르네가 남긴 것』(1999) 또한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현실을 벼텨 내지 못하는 한 소년의 비애를 통해 우리 시대의 잠재적 불안과 희망을 그리고 있다.
아직 살아 있다고 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고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렌츠의 이 작품은 이미 9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독일의 「포쿠스(Focus)」지가 ”1990년대 10년 동안 나온 독일어권 소설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듯이, 순수한 영혼의 좌절과 절망, 꿈과 동경을 절제된 문체로 차분하고 격조 높게 그려 깊은 울림을 전해 준다.
예민한 감수성과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열두 살에 이미 불행과 친숙해진 고독한 소년 아르네,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그 또래들의 무리에 그토록 끼고 싶어했지만 끝내 외돌톨이로 삶을 등져 버린 아르네, 맑디맑은 순수한 영혼으로는 도저히 타인의 편견과 몰이해 그리고 배타성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여리디여린 아르네. 렌츠는 이 불행한 소년의 초상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이웃들에게 마음이 닫혀 있는지, 편견과 차별로 똘똘 뭉친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얼마나 가혹한지 가슴 깊이 성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