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하늘 끝에 닿은 그리움, 천애지연(天涯之戀)!
대야성의 성주 진혁. 그리고 벽갈평의 양녀이자 만고당의 주인인 가연.
진혁과의 계약으로 대야성에 머물게 된 가연에게 진혁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주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무림 대회.
그곳에서 대야성을 둘러싼 상황은 급변하게 되는데…….
성하(星河)를 다스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붉은 입술이 부는 요적(妖笛) 소리에 하늘이 깨고
진주보다 흰 손이 두드린 동고(烔鼓)가 산을 울리네
몰려오는 사나운 폭풍은 비파 소리에 잠드나
검은 양금(洋琴)은 유부(幽府)의 사령(死靈)을 부르는구나
쟁(箏)의 흐느낌에 붉은 대지가 눈물 흘리고
칠현금(七絃琴)의 아득한 울림이 바다를 가르나
애절한 이호의 부르짖음에 어둠이 내려앉누나
미인의 웃음에 웃지 말고, 눈물에 울지 마라
세상의 명암이 그녀로 말미암으니,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으랴
2. 작가 소개
김경미
2002년 『그린 핑거』로 데뷔했다. 같은 해 『카사블랑카』를 시작으로 『야래향』, 『노란 우산』, 『청애』, 『눈 노을』, 『위험한 휴가』, 『매의 검』, 『화잠』, 『어긋난 휴가』를 냈다.
3. 미리 보기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가연의 몸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중단전(中丹田)에 잠들어 있던 내기를 천천히 이끌어냈다. 굳게 감겨 있는 눈두덩에 작은 땀방울들이 맺혔다. 혹시라도 알아차리지 않을까 두툼한 자물쇠로 친친 휘감다시피 닫아두었던 탓에 안에서 굳어버린 양 쉬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지고 달아난 비천상에서 나온 비급은 중단전을 사용하는 것이라 다른 이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어 오히려 그녀에게 한결 보탬이 되었다.
보아라. 진혁이 독에 당한 자신의 몸을 살폈을 때에도 감쪽같이 넘어가지 않았는가.
덕분에 독에 당해 저승 강을 건너갈 뻔하긴 했지만…….
“후우.”
실보다 더 가는 숨결이 길게 뱉어졌다. 들이마시는 숨은 그보다 더 길었다. 마지막 한 줌마저 들이쉰 가연이 감은 눈을 떴다. 심유하던 눈빛이 은은한 빛을 발하다 가라앉았다. 침상에서 내려와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와 꿩, 수선화, 백로가 채색 돌로 장식되어 있는 커다란 장(欌)의 아래쪽 판에 숨겨두었던 야행의를 꺼냈다.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가연은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기 전, 방의 한쪽에 놓인 불단에 놓여 있는 길쭉한 나무 부적패를 집었다. 양부의 손을 잡고 벽가장에 들어올 때 품에 간직하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지기가 홀로 남을 딸을 위해 만들어둔 부적이라 하여 양부가 소중히 하라 당부했었다.
가연의 얼굴빛이 깊은 심해처럼 무거워졌다. 깊디깊어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가는 손끝으로 세월에 반들반들해진 나뭇결의 홈을 쓸었다. 부적의 복잡한 문양이 손끝에 걸렸다.
두어 번 문양을 덧그리다,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려갔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부적패가 양쪽으로 쩌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십여 년 동안 숨어 있던 황금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꽃잎마저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는, 황금으로 만든 모란이 활짝 피어났다.
모란패를 바라보는 가연의 눈빛이 말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로 일렁거렸다. 원망과 분노가 해일처럼 일어나다, 안타까움과 서러움이 뒤따랐다. 어지러운 감정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지워나간 그녀는 종국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무색이 되었다. 모란패를 품에 단단히 집어넣고 얼굴을 복면으로 가렸다.
가연은 석란재의 내실을 눈도장 찍듯 둘러보았다. 들어올 때부터 오래 있지 않을 곳이라 여겨 정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도 아니었던가 보다. 소소에게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니 쉴 수 있도록 사람들의 출입을 막으라 일러두었다. 무림 대회 마지막 날이라 성내의 모든 시선이 대회장으로 향해 있을 터라, 내성의 작은 전각을 찾아올 이도 없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전각에서 나오지 마라. 밖에 호위하는 자들이 있을 터이니 안에만 머물면 안전할 것이다. 알겠는가?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절대로 전각을 나와서는 안 된다.’
새벽빛이 새어 들어올 때 즈음 침상에서 일어난 진혁이 몇 번이나 이르던 말이었다.
대야성의 적들이 기다리고 있던 때이자, 진혁이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그녀도 고대하고 있었던 때였다.
가연은 메아리처럼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진혁의 당부를 애써 떨쳐냈다. 오늘을 위해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길게 숨을 한 번 내쉰 가연의 신형이 허공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인적이 사라진 내실에 따뜻한 온기 한 줄기만이 맴돌다 사라졌다.
차가운 눈길로 피범벅이 된 비무대의 승자를 보던 진혁은 한순간 알 수 없는 기이한 떨림을 느꼈다.
‘음?’
뭔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사라져버린 기묘한 감각에 슬쩍 고개를 외로 꼬았다.
“성주님?”
상관준경이 낮은 소리로 진혁을 불렀다.
와! 와!
승자에 대한 열화와 같은 환호에 상관준경의 소리가 묻혔다. 새파란 하늘을 향해 치켜든 날카로운 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가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을 자극했다. 다섯 개의 비무대에 서 있는 승자들은 제각각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정파에서 유일하게 승자가 된 남궁 세가의 소가주인 남궁강도 있었다. 그 외의 다른 네 명은 모두 비무 대회 전까지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요란하던 사람들의 환호성이 한풀 꺾였다. 대회 진행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때맞춰 퍼져 나갔다. 승자는 정해졌지만, 비무 대회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승자는 도전자를 선택하시오. 대회장에 있는 무인이라면 그 누구도 승자의 도전을 거부할 수 없소.”
비무 대회의 승자는 자신이 도전할 수 있는 자를 고를 수 있었다. 그것은 승자의 권한이었다. 자신이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고수를 택할 수도 있고, 원한을 갚아야 할 원수를 당당히 불러낼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천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결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왼쪽 뺨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흉터를 가진 사내가 도전자를 지목하기 위해 천천히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숨을 죽이며 비무장에 서 있는 사내의 검이 움직이는 방향을 눈으로 좇았다.
“저, 저저!”
“아니, 지금 저자의 검이 어딜 향하고 있는 게야!”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승자가 되었다고 눈에 뵈는 것이 없어!”
“우! 우! 우!”
한쪽 편에서는 야유가 쏟아졌고, 다른 편에서는 응원이 쏟아졌다.
“용감하다! 사내라면 그 정도의 기백은 있어야지!”
“무인이라면 응당 천하제일인과 검을 논해봐야지!”
사내의 검첨(劍尖)이 향한 곳은 제일 높은 단상의 정중앙. 바로 대야성주가 앉아 있는 자리였다. 대부분의 무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사내의 무모한 도전에 고개를 내저었고, 일반 구경꾼들은 호기라며 열광했다.
도를 쓰는 두 번째 사내가 다시금 대야성주인 진혁을 지목했을 때 사람들은 의외라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 승자까지 진혁을 지목하자 불안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섯 승자 중 네 명이 마치 사전에 입을 맞춘 듯 똑같은 이를 지정했다. 역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발바닥을 간질이며 서서히 올라오는 듯했다. 야유와 환호성으로 가득하던 대회장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궁강은 미묘해진 대회장의 분위기에 차마 쥐고 있는 검을 뽑지 못했다. 그 역시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관준경이 진행자에게 들고 있던 섭선을 흔들었다.
“남궁 소가주도 도전자를 정하시오.”
비무장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남궁강에게로 쏠렸다.
과연 마지막 한 명인 그는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남궁강은 수많은 이목의 집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단호한 결심이 서린 눈빛을 이글거리며 한곳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남궁 대장로가 아닌가?”
“허어! 설마 자신의 작은할아버지에게 도전한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남궁 대장로는 왜 남궁 세가가 아니라 청마문과 같이 있는 것이지?”
남궁강은 청마문주와 함께 자리해 있는 남궁융기를 쏘아보았다. 자신이 비무 대회에서 이를 악물고 이긴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청마문주와 나란히 앉아 있는 작은할아버지와 겨뤄 이기기 위해서였다. 세가를 좀먹는 벌레와 같은 자였다. 창천(蒼天)이라 불리는 긍지 높은 남궁의 이름을 땅에 떨어트렸다. 존경하는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여동생마저 죽게 만든 원흉이었다. 세가에 드리운 암운의 원인은 모두 저자 때문이다.
조카손자의 도전을 받은 남궁융기는 허허허 하며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웃음기 없는 눈초리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대회를 진행하는 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었다. 그들은 단상에 있는 진혁의 눈치를 살피며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도전자는 네 명인데, 상대해야 할 사람은 한 명이었다. 어찌 비무를 진행해야 할지 난감한 그들은 서로 인상을 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 저길 봐!”
“성주님이시다!”
“성주님께서 비무대에 오르셨다!”
“성주님!”
단상에서 가볍게 몸을 날린 진혁은 소리도 내지 않고 다섯 개의 비무대 중 제일 가운데에 있는 비무대에 내려섰다. 네 개의 비무대가 모여 길쭉한 직사각형을 이루는 중앙점에 선 진혁은 자신을 포위하듯 에워싼 승자들을 훑어보았다.
“하나씩 상대하는 건 귀찮으니 한꺼번에 덤비도록. 너희들도 그 편을 원하겠지.”
확연한 도발 속에 빈정거림이 담겨 있었다.
“서, 성주님!”
진행자들이 기겁을 하며 진혁을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진혁은 그들의 울부짖음 따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용이 기지개를 켜며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우듯 서서히 기세를 키웠다.
“상관 군사!”
진행자 중 제일 직급이 높은 이가 단상에 있는 상관준경을 찾았다. 그러나 상관준경이 뭐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각자의 비무대에 떨어져 있던 네 명이 진혁을 향해 일제히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기운이 떨어진 듯 희미하게 사라졌던 검강이 검붉은 빛을 더해 강한 힘을 뿜었고, 도에도 시커먼 묵강이 구슬처럼 말려 날아올랐다. 긴 창두에는 무쇠라도 짓이길 강력한 경기가 회오리를 치며 쇄도했고, 낭창낭창 휘어지는 채찍이 공기를 찢으며 달려들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힘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공격에, 자리해 있던 대야성의 인사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칫 빗맞더라도 중상을 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공격들이었다.
차창! 창!
폭음이 울리며 사방으로 세찬 경기들이 튀었다. 몰아치는 힘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구경꾼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가까이 있던 이들 중에는 내상을 입은 듯 얼굴을 찡그리는 이들도 있었다.
진혁은 어렵지 않게 검강과 도환을 막았다. 짓쳐오는 창두를 감아올려 채찍을 막았다. 그의 묵검이 허공을 찍으며 날아오는 검로를 차단했다. 희뿌옇게 올라오는 먼지들 사이로 햇살을 받은 무기의 섬광들이 번쩍거렸다.
1대4로 붙은 대결인데도 우세한 것은 진혁이었다.
가닥가닥 끊긴 채찍을 집어던진 사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진혁이 다른 이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며 슬그머니 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궁을 꺼냈다. 화살도 걸려 있지 않은 핏빛 소궁으로 진혁을 겨눴다.
“안 돼! 무슨 짓이냐!”
지켜보고 있던 대야성의 무사가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무사의 검이 팔을 자를 찰나, 화살도 없는 궁이 파르르 떨었다. 촤악! 허공으로 시뻘건 핏줄기를 뿜으며 잘린 팔이 날아갔다.
“성주님!”
그와 함께 싸우고 있던 다른 세 명도 제각각 품에서 다른 암기를 꺼내 진혁을 향해 집어던졌다.
“성주님!”
“안 돼! 막아라!”
비무장 밖에서 심판을 보고 있던 무사들이 앞 다투어 비무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한발 앞선 자들에 의해 무사들의 목은 모두 날아갔다.
쾅! 콰르르르!
하늘을 시커멓게 메운 각양각색의 암기들이 진혁의 전신에 달려들어 꽂혔다. 그와 함께 뇌성벽력 같은 폭렬음과 함께 견디기 힘든 뜨거운 열기가 일었다.
“혈우시(血雨矢)!”
“천중뇌화주(天中雷火珠)!”
무음무형의 화살이라 누구도 피할 수 없어 한 번 울릴 때마다 생명이 하나씩 떨어진다 하여 붙은 이름이 혈우시였다. 천중뇌화주는 지금은 사라진 열화문의 화탄으로, 어린 아기의 주먹보다 작은 구슬 모양으로서 폭발의 위력과 미치는 영향을 조절할 수 있다 전해졌다. 둘 모두 금용암기(禁用暗機)로 강호에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촹! 차창!
단상에 있던 상관준경은 등 뒤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살기와 함께 무기를 빼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옆에 자리하고 있던 벽갈평이 몸을 일으켰다. 단상 주변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 중 절반이 같은 동료의 손에 쓰러지고 있었다.
“으악!”
“자네가……?”
영문을 모른 채 동료의 손에 죽어나가는 무사들의 눈에 경악과 불신이 떠올랐다.
“갈!”
산중 제왕이라 불리는 호랑이의 포효 같은 소리 앞에서 검을 휘두르던 자들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벽갈평의 얼굴은 딱딱해졌다. 그가 방금 펼친 벽력후(霹靂吼)라면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드리며 자리에 주저앉아야 마땅했다.
“이놈들! 일월단(日月團)의 무사들이 아니구나!”
단상 주변의 경호는 대야성의 무력단 중 하나인 일월단에서 맡고 있었다. 그들 중 반수가 다른 이들로 얼굴을 바꿔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벽갈평은 허리춤에 걸려 있는 도집에서 자신의 도인 명도(冥刀)를 꺼냈다.
일이 터질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일월단에도 그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니! 진정 무섭구나! 성주님이 더 이상 시일을 끌지 않고 결단을 내리신 것이 앞날을 생각한다면 옳은 것인지도…….
도첨에 서린 기세에 단상을 포위하듯 둘러싼 적들이 주춤했다.
“대단하시오, 벽 원주. 사자패도(獅子覇刀)라는 별호가 오히려 부족할 정도이올시다!”
조롱조의 감탄성을 발하며 다가온 이는 청마문의 삼장로인 혈마군(血魔君)이었다. 벽갈평과 비슷한 연배의 점잖은 인상이었지만, 기실 내공의 힘으로 노화를 억눌러 열 살 정도 젊어 보였다.
“혈마군 장로께서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이시오?”
벽갈평은 적이 분명한 그에게 일단 말을 걸었다. 청수한 인상이었던 혈마군의 얼굴이 가면을 벗고 본래의 야비한 기운을 드러냈다.
“괜한 것을 물어보시는구려. 내가 이들 사이에 있는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소.”
“청마문이 대야성에 반기를 든 것이오?”
“벽 원주답지 않게 말꼬리를 잡는구려. 어차피 눈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무엇하러 복잡하게 생각하시오.”
“그대 독단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꾸몄을 리는 없으니, 청마문주의 하명이오?”
그제야 혈마군은 벽갈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신의 입에서 문주님의 이름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런!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소이까.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데, 괜한 짓을 하셨구려.”
혈마군이 입가에 살기를 띠며 웃었다.
“무슨 말이오?”
“내 입에서 듣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오.”
벽갈평이 눈을 부릅뜨며 단상 아래의 비무대를 돌아봤다. 아직도 열기가 이글거리는 비무대 위로 붉은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거침없이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