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하늘 끝에 닿은 그리움, 천애지연(天涯之戀)!
대야성의 성주 진혁. 그리고 벽갈평의 양녀이자 만고당의 주인인 가연.
진혁과의 계약으로 대야성에 머물게 된 가연에게 진혁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주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무림 대회.
그곳에서 대야성을 둘러싼 상황은 급변하게 되는데…….
성하(星河)를 다스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붉은 입술이 부는 요적(妖笛) 소리에 하늘이 깨고
진주보다 흰 손이 두드린 동고(烔鼓)가 산을 울리네
몰려오는 사나운 폭풍은 비파 소리에 잠드나
검은 양금(洋琴)은 유부(幽府)의 사령(死靈)을 부르는구나
쟁(箏)의 흐느낌에 붉은 대지가 눈물 흘리고
칠현금(七絃琴)의 아득한 울림이 바다를 가르나
애절한 이호의 부르짖음에 어둠이 내려앉누나
미인의 웃음에 웃지 말고, 눈물에 울지 마라
세상의 명암이 그녀로 말미암으니,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으랴
2. 작가 소개
김경미
2002년 『그린 핑거』로 데뷔했다. 같은 해 『카사블랑카』를 시작으로 『야래향』, 『노란 우산』, 『청애』, 『눈 노을』, 『위험한 휴가』, 『매의 검』, 『화잠』, 『어긋난 휴가』를 냈다.
3. 미리 보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날씨가 매서워졌다. 동장군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불어오는 바람에는 얼음 같은 찬기가 실려 있었다.
“강바람이 차지 않나?”
얕은 얼음이 깔려 있는 강물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가연이 소리를 따라 몸을 돌렸다. 진혁이 그녀를 찾아 선미로 나왔다. 털을 덧댄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지만, 얼굴에 닿는 바람이 싸늘해 걱정이 되었다.
“괜찮습니다. 선실에만 있으려니 답답하던 참이라, 오히려 바람을 맞으니 한결 시원한 듯합니다.”
하남성으로 넘어오자마자 운하를 오가는 커다란 배를 탔다. 사천으로 갈 때처럼 말만 달리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배를 택한 것이다.
사람들만 실어 나르는 여객선이라 여기저기 온갖 잡다한 이들이 모여 있었다. 돛이 없이 양쪽에 달린 물레방아가 돌아가면서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형태라 사람들이 신기해 하며 갑판에 옹기종기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진혁은 손을 뻗어 강바람에 발갛게 언 가연의 뺨을 감쌌다.
“뺨이 이리 차지 않은가. 여기에서 더 찬 기운을 쐬면 자칫 고뿔에 걸릴지도 모른다. 잠시 후 임구(任丘)에 도착한다니 오늘은 그곳에서 내리지.”
“북경까지 이 배로 가는 것이 아닙니까?”
“괜찮다. 임구에서 여독을 잠시 풀고 다음 배를 타도 된다.”
가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일 선실에서 지내는 것이 힘겨웠는데, 배에서 내린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배라는 한정된 공간이다 보니 먹는 것부터 씻는 것까지 모두 불편했다. 내색하지 않는다 했는데도, 그예 들킨 모양이다.
“선착장이닷!”
선수에서 뱃길을 살피던 선부 하나가 소리쳤다. 정박할 선착장이 보이자 짐들을 바리바리 꾸린 사람들이 선실에서 우르르 갑판으로 몰려 나왔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이들의 손을 단단히 움켜잡는 부모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상행을 나선 이들도 각자의 짐을 짊어졌다. 배가 서서히 선착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내릴 수 있도록 뱃전에 긴 판자가 걸쳐졌다.
진혁과 가연은 우르르 몰려 내리는 사람들 뒤편에서 잠시 기다렸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한꺼번에 내리는 것보다 좀 늦더라도 사람들 숫자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움직이기 나았다.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이제야 선실에서 갑판으로 올라오는 이들이 있었다. 웬만한 장정들보다 몸집이 한 배는 더 커 보이는 우람한 체구에 허리춤에는 화려한 도집을 걸친 자들이었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진혁은 도집에 새겨져 있는 호랑이 문양을 보았다.
팽가(彭家)로군.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오대 세가의 수좌 자리를 놓고 남궁 세가와 경쟁하는 사이이기는 하나, 결국 오대 세가는 한 묶음으로 봐야 했다. 아직 남궁 세가의 대장로가 팽가에까지 손을 뻗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북경에서 움직이려면 어떻게든 팽가와 조우할 터.
임구는 북경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지만, 기실 다른 것으로 더 유명했다. 지하 깊숙이 온천이 흐르고 있어, 추운 겨울이면 북방에서 온천을 찾아오는 유람객들로 넘쳐났다.
임구의 객점들은 지하수를 끌어다 온천으로 활용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온천탕이 자리한 곳에 터를 잡기도 했다. 그리해 객점들마다 제법 큰 규모로 객방을 많이 만들었다.
진혁은 성도에 갔을 때처럼 익숙하게 임구의 번화한 거리를 나아갔다. 해거름 시간이라 다들 객점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었다. 번화가를 나가 객점을 찾아보려던 진혁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느꼈다.
선착장에서, 배에서 내릴 때부터였나. 따라붙는 무리들이 있나 싶었더니……. 진혁은 자연스럽게 가연의 손을 잡았다. 면사를 드리운 가연은 눈을 들어 흑립 아래의 진혁과 시선을 마주쳤다. 말없이 안언으로 전하는 뜻을 읽었다.
진혁은 가연을 단단히 끌어다 몸에 가까이 붙인 후 객점을 찾는 듯 거리를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가연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온천을 찾아 유람을 온 부부처럼 평이했다.
진혁과 가연은 번화가의 뒷길로 빠졌다. 처마마다 홍등이 주렁주렁 걸려 있고, 호객을 하는 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사라진 뒷골목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인적도 없어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들렸다. 해거름에 타오르듯 시뻘겋게 붉은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이는 햇살은 금세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리라.
진혁과 가연은 외지고 앞이 막힌 골목으로 들어섰다. 진혁은 막힌 벽을 등지며 걸어 들어온 입구를 봤다.
“나와라.”
진혁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대로 향했다. 그에게서 발산된 적의에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나오지 않으면 벤다.”
진혁이 검을 잡아 빼려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사람이 뚝 떨어졌다. 동시에 갑자기 나타난 무사들이 입구를 막았다.
“소신을 알아보시겠습니까?”
검은 장포를 걸친 사내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진혁은 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물론. 만나자마자 제 주인을 위해 검을 휘두른 자이니.”
사내는 듣기 민망하다는 듯 더욱 허리를 숙였다.
“제 주인께서 객(客)이 오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장서라.”
진혁은 기다렸다는 듯 검에서 손을 뗐다.
사내가 허리를 바로 세우자, 담장처럼 에워싸고 있던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사내는 조심스러운 몸놀림으로 길잡이를 나섰다. 으슥한 골목을 여러 번 꺾어 들어갔다. 짧은 해가 지자 불빛 한 점 없는 골목은 어두컴컴해졌다. 제 발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끌벅적한 번화가를 벗어나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즐비한 거리로 나오자 하나둘씩 불빛들이 보였다.
사내는 높다란 담장이 올라간 장원의 문을 두드렸다. 눈빛이 형형한 문지기가 나와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시던 손님들이시다.”
문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진혁과 가연이 안으로 들어가자, 밖으로 나와 좌우를 살핀 후 서둘러 문을 닫았다.
중정으로 들어온 사내는 힐끔 가연을 보았다.
“주군께서는 홀로 만나시길 원합니다. 소저는 여독으로 피곤하실 터이니 방에서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영문도 모른 채 진혁의 손에 이끌려 온 가연은 대답 대신 진혁을 쳐다보았다. 뭐라 그녀가 답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를 어찌 믿고 그녀를 맡긴단 말이냐? 그에겐 내가 직접 말할 터이니 신경 쓰지 마라.”
“주군을 믿지 못하신다는 겁니까?”
사내가 화를 꾹 눌러 참듯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진혁에게 대들어 검을 세워본들 자신의 필패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차마 달려들지는 못했지만, 울분을 감추지는 않았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내가 그를 믿지 않듯, 그 역시 나를 믿지 않는다. 너 역시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무…….”
사내가 뭐라 반박하려 할 때였다. 굳게 닫혀 있는 전각 안에서 호령이 떨어졌다.
“상관없다! 둘 다 안으로 들여라!”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잰 걸음으로 달려가 전각의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그러면서도 진혁을 향해 슬쩍 원망스러운 눈빛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 안은 여기저기 촛불을 밝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넓지 않은 방의 상좌에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진혁은 앉아서 자신들을 맞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세작들의 보고대로라면 제 처소에 감금당해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더니…… 말짱 거짓이로군. 돌아가자마자 황실에 심어둔 세작들을 싹 갈아버려야겠어.
“뭐가 웃기지?”
진혁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내는 검은빛이 감도는 짙은 자줏빛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진혁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네가 밖에 있는 걸 모르고서 널 감금해두고 있다고 의기양양해 할 네 적들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너 역시 비슷한 심정일 텐데, 태자 전하.”
태자라는 말에 가연이 사내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마침 태자인 주기첨(朱起添)도 코웃음을 치다 그녀를 보았다.
“하! 항상 혼자 다니던 너답지 않게 여인을 데리고 온다 싶었더니, 예사 여인은 아니로군 그래. 황태자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있는 것을 보니.”
가연은 살짝 고개만 숙였다. 아래로 내리깐 시선을 살며시 들며,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을 보았다.
“전하께서는 태자의 신분으로 이곳에 나오신 것이 아닌 듯하여 예를 올리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이라도 원하신다면 올리지요.”
주기첨의 미간이 꿈틀했다. 차분한 어조로 공손히 말하는데도 왠지 빈정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억지로 예를 강요하면 자신이 속이 좁은 소인배가 된다. 주기첨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인사라면 지겹게 받는 것인데 여기서까지 받아 무엇할까. 네 말대로 예를 받을 요량이었다면 이 녀석에게서 받았어야 함이니.”
진혁과 가연은 태자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평시라면 황족인 태자와 마주 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진혁은 태자인 주기첨을 상대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상을 준비하라 일렀다. 들이라 할까?”
“같이 먹으면서 체하라는 뜻인가?”
“그렇긴 하군. 논할 일도 있으니, 밥을 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주기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봐야 하지 않나? 아무리 눈가림을 잘하고 있다지만, 지금 황궁을 비워 너한테 득 될 것이 없으니 말이다.”
“네 말이 옳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저들이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니 서둘러 돌아가야 하지.”
주기첨은 지친 기색을 내보이며 중얼거렸다.
“날 만나러 북경으로 오는 게, 맞나?”
“겸사겸사지. 내가 아는 너는 태자궁에 감금당해 있을 이가 아닌데, 어찌 된 일인가 싶기도 하고, 재미있는 작당을 꾸민 황가의 분위기도 궁금하고…….”
주기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후회와 자책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네 충고를 따랐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내 실수야. 내 오판이 부황과 황실을 위험에 빠트렸어.”
4년 전 진혁은 태자에게 귀비를 잘라내야 한다고 경고했었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태자의 모후가 승하한 후, 간택령을 내리는 대신 후궁들 중에서 황후를 고르기로 했었다. 그때 진혁은 황실과 대야성의 관계를 생각해 친절하게 태자에게 전언을 날렸었다. 황 귀비만은 황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태자는 진혁의 경고를 무시했었다. 아무리 황 귀비가 황 재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태자인 자신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자신했었다. 그러나 곧 황자를 낳은 황후와 황 재상의 세력은 황태자인 자신을 넘어뜨릴 정도로 막강해졌다.
“황제 페하의 안위는?”
진혁은 태자의 넋두리를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뒤늦은 후회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낙담을 할 때에 그 대책을 고심하는 것이 나았다.
주기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건천궁에 계신 것은 확실한데 안을 확인할 수가 없다. 무관들만이 아니라 무림인까지 은밀히 숨어 있어 접근할 수가 없으이. 건청궁은 황후와 황 재상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고 보면 된다.”
진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황제의 침전이 황가에 장악되었다는 말에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대야성에 전령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딱 맞춰서 상관 군사가 전서구를 날렸더군. 네가 올라오는 중이라고. 그래서 북경보다는 이곳에서 보는 것이 낫다 싶어 기다리고 있었다.”
주기첨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말했다.
“황실을 위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진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기실 대야성과 황실은 불가근불가원처럼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때론 으르렁거리다 때론 지금처럼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진혁도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함께 황성에서 주기첨을 만났었다.
주기첨은 그의 침묵을 망설이는 것으로 보았다.
“너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 텐데. 너 역시 황가의 힘이 더 이상 커져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황가의 딸이 네 정혼녀라는 소문이 중원 전역에 파다하던데…….”
“내 정혼녀는 한 명뿐이다.”
“그러니까, 그 한 명이 황가의 벽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잖아. 만약 네가 아니라고 하면, 황가에서는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널 몰아붙일 거다.”
“내가 황가의 수작에 신경이라도 쓸 것 같은가?”
“음, 신경 쓸 것 같아. 그러니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진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주기첨을 쏘아보았다. 처음부터 네 녀석이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대야성의 무인들은 나설 수 없다.”
주기첨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 황가에 더 큰 빌미를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진혁의 운신도 좁아진다.
“대야성의 무인들은 필요 없어.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니.”
주기첨은 진혁을 똑바로 보았다. 중원에서 가장 강하다 알려져 있는 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래, 대야성의 무인 모두를 합쳐도 너 한 명에 못 미치지.”
“뭘 시키려는 요량이냐?”
진혁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황실이 황가를 정리한다면 한결 자신의 짐이 수월해지리라. 만약 황 재상의 손자가 태자가 된다면 그 영향은 곧장 대야성에 미칠 것이다. 황벽군이라는 태풍의 눈이 이끄는 거대한 태풍으로.
“건청궁에서 부황을 모시고 나와다오. 너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부황을 구하는 것이 가능할 터.”
그때까지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가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물음 자체가 불경하겠으나, 그래도 여쭤보겠습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무사하시다 생각하시는 근거가 있습니까? 요 근래 폐하의 용안을 뵌 이가 없다 들었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주기첨이 의자 손잡이를 손으로 꽝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가연을 노려보았다. 한갓 아녀자에게까지 황실의 나약함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그의 지고한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가 났다. 그럼에도 주기첨은 순순히 털어놓았다.
“저들은 아직 옥새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렇군.”
주기첨의 한 줄의 짧은 설명에 진혁과 가연은 바로 이해했다.
“그래. 옥새를 넣을 때까지 저들은 부황의 안위를 지킬 것이다. 그러니 저들이 옥새를 손에 넣기 전에 부황을 저들의 손에서 빼돌려야만 한다.”
“하지만, 건청궁에서 폐하를 구해내어도 문제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폐하를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저들이 군사라도 일으킨다면 어찌합니까? 황가의 병력은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라 들었습니다.”
사병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국법이었건만, 황 재상은 눈을 피해 사병을 몰래 키우고 있었다. 그 외에 돈과 명예와 계집으로 끌어들인 무림인들의 숫자도 꽤 많았다.
“부황만 구해낸다면 오군도독부와 금의위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네. 지금 그들은 권력 다툼에 개입하지 않는다며 중립을 지키고 있으니까.”
“황제 폐하와 함께 옥새도 찾아야 할 겁니다. 황제 폐하를 구해도 옥새가 저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정말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옥새의 권위와 황제의 권위가 부딪치면 피를 흘리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
주기첨과 진혁은 좀 더 일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가연은 곁에서 종종 의문점이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사항들을 지적하며 상기시켰다. 일의 전반적인 상황들이 결정되자, 주기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 길로 바로 환궁한다. 대대로 태자에게만 가르쳐준 비도를 통해 돌아가니, 아무도 내가 태자궁을 나갔다 왔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폐하를 구한 다음, 다시 보지.”
방을 나가던 주기첨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몸을 돌렸다. 얼굴에 지친 흔적이 역력한 가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언뜻 봤을 때에는 몰랐는데, 이리 주시해서 보니 제법 볼 만하구나. 그대, 진혁의 첩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황제의 후궁이 되는 것은 어떠하냐? 너라면 귀비보다 더 높은 황귀비(皇貴妃)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신분이 없는 첩보다는 궁의 후궁이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영리하지만, 영악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얼굴은 미색이 뛰어나지 않았지만 동료나 의논자로 곁에 두기에 딱 좋았다. 눈치도 빠른 것이 황궁의 암투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셈이면 그만 가라.”
“터무니없다니? 네 첩실보다는 차라리 황제의 후궁이 낫지.”
진혁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단순한 장난으로 들어 넘기기에는 가연을 보는 주기첨의 눈빛이 진지했다. 진심으로 가연을 욕심내고 있었다. 진혁이 날 선 눈으로 경계심을 높였다.
“손에 들어온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다는 내 습성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슬며시 낮아지는 목소리가 주기첨의 정수리를 쿡쿡 찔렀다. 전해지는 소식과 함께 북경까지 오는 것을 보고 진혁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구나 싶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알고말고. 그냥 장난이었다, 장난이었어.”
살벌한 경고에 주기첨은 괜한 벌집을 건드렸구나 싶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방문이 닫힌 전각을 돌아보았다. 죽은 정혼녀만 붙잡고 살던 녀석이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었구나 싶었다.
주기첨은 피풍의를 걸친 후 둥근 방립을 쓰며 장원을 나섰다. 내려오면서 무거웠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가벼워져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