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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천애지연 02권
글쓴이
김경미 저
출판사
가하
출판일
2016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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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미지

김경미

2002년 『그린 핑거』로 데뷔했다. 같은 해 『카사블랑카』를 시작으로, 『야래향』, 『노란 우산』, 『청애』, 『눈 노을』, 『매의 검』, 『화잠』, 『웨딩돌 하우스』, 그리고 특수 요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휴가 시리즈 『위험한 휴가』, 『어긋난 휴가』와 『화잠』을 출간했다.
한땀 한땀 바느질해 인형 만드는 것을 좋아하며, 몸과 마음 아픈 곳 없이 행복하길 바라는 소박한 작가이기도 하다.

책 소개

분야로맨스
1. 작품 소개

하늘 끝에 닿은 그리움, 천애지연(天涯之戀)!

부모의 죽음으로 검은 수렁에 빠졌던 자신을 구해준 어린 정혼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만든 인연이 오히려 자신에게서 그녀를 앗아가 버렸다.
세월이 흘러도 가슴 속에 담긴 정혼녀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그녀를 앗아간 자들에 대한 대가를 하나씩 준비하는 진혁 앞에 낯선 얼굴의 여인이 나타났다!

성하(星河)를 다스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붉은 입술이 부는 요적(妖笛) 소리에 하늘이 깨고
진주보다 흰 손이 두드린 동고(烔鼓)가 산을 울리네
몰려오는 사나운 폭풍은 비파 소리에 잠드나
검은 양금(洋琴)은 유부(幽府)의 사령(死靈)을 부르는구나
쟁(箏)의 흐느낌에 붉은 대지가 눈물 흘리고
칠현금(七絃琴)의 아득한 울림이 바다를 가르나
애절한 이호의 부르짖음에 어둠이 내려앉누나
미인의 웃음에 웃지 말고, 눈물에 울지 마라
세상의 명암이 그녀로 말미암으니,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으랴

2. 작가 소개

김경미

2002년 『그린 핑거』로 데뷔했다. 같은 해 『카사블랑카』를 시작으로 『야래향』, 『노란 우산』, 『청애』, 『눈 노을』, 『위험한 휴가』, 『매의 검』, 『화잠』, 『어긋난 휴가』를 냈다.

3. 미리 보기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손님. 지난번에 오셨던 무사분이 아니십니까?”
하 총관은 허리를 굽히며 아는 척을 했다. 소문의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지만, 총관답게 웃는 얼굴로 손님을 대했다.
“오늘은 무얼 찾으러 오셨습니까?”
서가를 정리해둔 분표(分表)를 집어 들며 공손히 물었다.
“이곳의 주인을 만나러 왔다.”
분표를 뒤적이던 하 총관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네?”
“만고당의 주인인 벽가연을 보러 왔다는 말이다.”
두 번의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냉랭한 대답에 하 총관의 안색이 희끗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길로 뒤적이던 분표를 내려놓았다. 그 와중에도 대답하는 자세는 극진했다.
“당주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오늘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당주님을 만나시려면 다음에 다시 발걸음을 해주시지요.”
마치 이것이 총관의 바른 자세라는 것처럼. 파들거리는 눈가의 경련만 아니었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찾는 이가 있으면 그리 말하라 하던가?”
하 총관은 주름진 볼살을 늘이며 웃었다. 늙어 질긴 가죽이라 웬만한 말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진혁이 말을 툭 던지기 전까지는.
“산에서 있었던 일을 논의하고자 한다고 전하시게. 자리를 피한다면 그 일이 어찌 번질지 나도 예측하기 힘들다는 말도 덧붙이고.”
산이라. 하 총관은 산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시신처럼 얼굴이 허옇게 떴다. 황금전장과 약속을 잡았던 산장의 일이라니……. 당주님의 몸이 편치 않으시다는 자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모습을 보이자마자 혼절한 당주님은 신음성도 없이 앓고 계셨다.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했었다. 차라리 방 대협이 돌아올 때까지 치부장의 처리를 미뤘어야 했다. 방 대협이 당주님을 지키고 있었다면 그나마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을.
해남에 있는 방 대협에게 초지급으로 연락을 보냈으니 받자마자 올라올 것이다. 그러나 방유는 멀리 떨어져 있고 진혁은 당장 눈앞에 있었다. 하 총관은 강압적인 안어(眼語)에 쪼여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섰다.

침상에 누워 있던 가연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지금 누가 왔다고 하셨나요?”
간신히 든 잠을 깨워 면목이 없다는 듯 하 총관은 고개를 숙였다. 가연은 손으로 침상을 짚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때, 왜, 위작소의 상가를 잡으러 갈 때 함께 나서주셨던 무사분 말입니다. 그분께서 당주님을 만나겠다고 오셨습니다.”
가연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간신히 피딱지가 앉았던 입술이 다시 툭 터졌다. 이불에 가려진 손이 이불속을 틀어쥐며 잘게 떨었다.
지금은 안 돼! 당장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가연은 비겁하지만 피하고자 했다.
“몸이 좋지 않아 나가기 힘들다고 하셨나요?”
항시 부드러운 꽃잎처럼 촉촉하던 음성이 바짝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버석거렸다.
“예. 외인을 만나기 힘드시다 말했더니…… 산에서 있었던 일을 논의하고 싶다면서…… 나오지 않을 시엔 그 일이 어찌 번질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
가뜩이나 창백하던 가연의 얼굴이 하얗게 바랬다.
“그가 그리 말하던가요? 어찌 번질지 모른다고?”
“예, 당주님. 대체 산장에서 어떤 참변을 겪으신 것인지, 소인이 참말 무덤 속에 들어가 눕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 총관은 침상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대성통곡하듯 외쳤다. 가연에게서 말을 들은 것은 아니나, 그녀를 진료한 의원에게서 조심스러운 운을 받았다. 귀한 몸 여기저기에 심상치 않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필경 험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 했다. 하 총관은 황망하여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돌아가는 의원의 입을 꽁꽁 틀어막는 것은 잊지 않았다.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의 앞길이 달린 일이었다. 의원도 하 총관의 부탁을 알아들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제 잘못된 판단으로 죽은 목숨이 몇입니까? 그들을 생각한다면 엄살을 부릴 수 없지요.”
“명령하신 대로 지금껏 끌어 모은 황금전장의 어음을 한꺼번에 돌리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황금전장의 자금이 경색될 것입니다.”
독이 오른 하 총관이 뽀득뽀득 늙은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네, 알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달리 복안이 있으신 겁니까?”
침상 끝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가연이 한참 동안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흔한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당한 만큼 저들도 잃는 것이 있어야겠죠.”
“당연한 말씀입니다.”
“고리업에 치우쳐 있는 황금전장의 주요 지점을 지우세요. 동시다발적으로. 어음이 돌아가는 시기에 맞춰서.”
“……알겠습니다, 당주님.”
“황금전장의 표국에 대해서도 중원 표국에 일러 제가 지시한 것들을 시작하라고 하세요.”
하 총관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쓰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내밀었던 봉서들. 거기에는 만고당에서 갈래가 뻗어나간 사업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숙박업부터 시작해 표국업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신강에서부터 남해 끝 해남에까지 구석구석 만고당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닿아 있었다. 그것은 만고당이 생기기 이전부터 가연의 가문이 뿌리를 내린 것들이었다.
“하온데, 서탑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은…….”
하 총관은 말끝을 흐렸다. 서릿발 같은 기세로,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들어와 있는 가연의 존재를 재우쳐 묻는 것이, 하 총관이 상대하려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쏘아보는 눈빛이 마치 북해의 빙정 같아 뒷골이 서늘했다.
그래,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고 했다. 차라리 기다리다 포기하고 돌아가길 바랐다. 허나,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것은 기어이 자신을 보겠다는 뜻.
“나가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세요.”
“만나실 요량이십니까?”
가연은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단정히 쓸어 넘겼다. 가지런히 정리되는 머리 타래처럼 어지러운 마음도 정리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귀한 걸음을 하셨으니, 무슨 용건인지 들어봐야지 않겠습니까?”
방을 나오는 하 총관의 발걸음이 마음만큼 무거웠다. 피를 볼 것이 분명한 황금전장과의 상투(相鬪)보다 어찌 서탑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일이 더 어렵고 험난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몸을 움직임에 처음보다 한결 나았다. 푸른 저고리의 앞섶 매듭을 짓다 걷혀 올라간 소맷단 아래로 붉은 화흔(花痕)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가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흔이 찍혀 있는 곳은 그곳만이 아니었다. 가연은 손으로 가슴둔덕을 눌렀다. 깨물리고 빨린 유두는 아직도 빨갛게 성이 나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아팠다.
가연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쫓았다. 일을 처리하느라 벽가장으로 돌아가지 못할 때 머물던 방이라 그녀의 옷가지들도 궤에 넣어두고 있었다. 미색 치마끈을 단단히 동여매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약에 중독되어 일어난 불상사. 하물며 그는 치부장과 목함까지 챙겨 가져갔다. 동굴을 나올 때 안을 살펴봤지만 서책과 목함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몸에 챙겨두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단장할 시간이 없어 비취로 만든 머리꽂이를 귀 옆에 꽂은 다음 방을 나섰다.
하늘이 새파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북풍이 불어오면서 더욱 시린 푸른빛을 발했다. 하늘이 맑아질수록 공기는 차가워지겠지. 겨울 날 준비를 일러두었는데, 제대로 해뒀는지 모르겠다.
멈춰 서서 한참 동안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바라보던 가연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답답함을 토해냈다.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오가던 길이 오늘따라 한 발자국 떼는 것조차 힘들었다.
서탑의 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가의 오래 묵은 책 냄새가 제일 먼저 그녀를 반겼다.
서가에 기대어 있던 진혁은 파리한 낯빛에 미색 치마를 입은 가연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손님에게 보이던 의례적인 미소가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지금은 안 나는군.
동굴에서도 그녀가 잠에 빠져들 때부터 향기가 서서히 사라졌었다.
경직되어 있긴 했지만, 가연은 꿋꿋하게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절 찾으셨다고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달라진 것은 없어. 그것은 우연한 사고에 지나지 않아. 갑자기 언덕에서 굴러 떨어진 바윗돌에 깔리는 사고처럼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었던 일.
허나 진혁의 생각은 달랐다. 진혁은 자신을 만고당의 손님으로만 대하려는 가연의 의도를 무시했다.
“몸은 어떤가?”
애써 미소를 짓고 있던 가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는 처음이었고, 난 처음인 네 사정 따위 봐주지 않았으니까.”
아니, 약에 취해 매달리는 널 달래기는커녕 힘겨워하는 널 내 욕심껏 안았지.
가연은 미소를 지웠다. 소맷단 아래에서 양손을 단단히 마주 잡았다.
“……괜찮습니다.”
“무모한 짓이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대체 뭘 믿고 고작 그 인원을 데리고 호랑이 굴로 들어간 거지? 대범한 것과 무모한 것은 다르다.”
“질책이라면 감사히 받아두지요. 그 말씀을 하실 생각으로 오셨던 거라면, 제 오판을 뼈가 아릴 정도로 통감하고 있으니 더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혁은 휙 돌아서는 가연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을 보도록 돌려 세웠다. 그가 만들었던 화흔이 귀밑머리에 가려져 있다 살짝 드러났다.
“목숨을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없군.”
“공으로 구해주신 것이 아니지요. 그런 입에 발린 공치사를 듣고 싶으시면, 다른 곳을 찾아가십시오.”
손님과 가게 주인이라는 자리를 버린 가연은 매서운 입담을 보였다. 잡힌 팔을 떨쳐내려고 애쓰는 가연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서로의 몸이 부딪칠 정도로 바짝 붙은 그녀의 귓전에 입술을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그렇지. 공은 아니었지.”
가연의 귀가 새빨개졌다. 수치심과 분노에 광대뼈 부근도 불그스름해졌다.
“내가 오늘 온 것은 네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고,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다.”
가연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손목을 움켜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내가 부탁했던 비천상의 거래를 거절했으면서, 왜 전충이 가진 비천상을 얻으려고 한 거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말이야.”
과연, 뭐라고 설명할 것이냐.
가연은 태연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기회인데, 목숨인들 아깝겠습니까? 손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는 물건의 존재 유무도 불확실하던 때였지요. 마침 우연히 황금전장주에게 귀한 백옥상이 있다 하여 운을 뗀 것이 천행처럼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지요.”
“요행히 정보를 얻었다?”
“예. 이런 정보들 중 백에 아흔아홉까지는 헛소문이지요. 허나 개중 한 개 정도는 진실이 존재한답니다. 만고당과 같은 골동품상은 그 하나를 찾아 중원을 뒤지는 것이 본업입니다.”
“내가 말한 청부와는 상관이 없다?”
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온전히 구한 후 다시 손님에게 물건을 사실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아도 되는 것이니까요.”
앞뒤로 빈틈이 없는,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완벽한 설명이었다.
“제게 하고자 하신 질문은 그게 다입니까?”
“그래.”
“허면, 저와 하시려는 거래는 무엇입니까? 비천상은 이미 가져가셨지 않습니까?”
가연은 비천상을 돌려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산장에서 구명을 받았을 때, 이미 비천상의 소유권은 넘어간 것이다. 치부장보다 비천상을 넘기게 된 것이 더 속이 쓰렸다.
진혁은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가연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두었다.
“그대도 대야성에 공표된 소문을 들었겠지.”
가연은 슬쩍 무릎을 굽혔다 펴며 인사를 올렸다.
“중원에서 아리땁기로 유명한 여인들을 부인으로 들이시게 된 것을 경하드립니다.”
비록 정식 혼례를 올리는 것도 아니요, 신분도 없는 첩실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일단 대야성의 내성에 성주의 부인이 들어오는 일이었다. 진혁의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로 텅텅 비어 있던 공간이 다시 채워지는 것이라 중원 전체가 떠들썩했다.
그녀의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며 진혁은 거래 내용을 끄집어냈다. 마치 그녀의 얼굴이 어떻게 바뀔지 똑똑히 보겠다는 듯, 그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내성으로 들이는 여인들 중에 그대도 있었으면 한다. 청백지신을 내가 깨트렸으니, 그 정도의 책임은 져야 하지 않나?”
“아니요!”
가연은 고개를 힘껏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으로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책임감 따위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중독된 절 살려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을요. 목숨과 바꾼 대가였다 생각하고 있으니, 크게 개의치 마십시오.”
“난 책임을 지고 싶다! 아니, 반드시 질 것이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 하지 않습니까? 헌데 왜 쓸데없는 억지를 부리려 하십니까?”
격렬하게 거부하는 그녀에게 진혁이 잔인할 정도로 이성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대를 위해서가 아니다. 날 위해서일 뿐. 내성에 내 세력이 있어야만 한다.”
“저는 당신의 세력이 아닙니다!”
“허나, 그대의 양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 지지하는 세력의 대표자이지.”
진혁은 간단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내밀었다. 가연은 시선을 돌려 진혁을 외면했다.
“싫습니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정식 부인도 아니요, 내성의 한 귀퉁이에 숨어 살아가는 첩으로 들어오라니.
고집스레 거절할 것을 알고 있던 진혁은 다른 미끼를 내걸었다.
“만약 이 자리를 받아들인다면 대야성의 비고는 물론이고, 천가의 비고에서 네가 원하는 물건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하마.”
비고라는 소리에 가연은 흠칫했다. 하늘에 펼쳐진 그의 그물이 조금씩 조여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고라니…….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곳에는 만고당에서 구하려 해도 못 했던 물건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귀해도 물건은 물건이지요. 한갓 물건 따위에 소녀를 걸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연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심하고 있던 문제를 쉬이 풀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하니 저절로 귀가 팔랑거렸다.
“내게 장사꾼이라 하지 않았나? 상인이라면 일생일대의 거래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걸 줄 알아야지.”
대꾸할 말이 없어 가연은 입술만 즈려물었다. 부푼 입술이 애참할 정도로 짙은 선홍빛이었다. 지난밤 내내 그의 품에서 달뜬 숨을 토해내며 울음 섞인 교성을 지르던 입술이었다.
진혁은 앞으로 나가려는 손을 억지로 참았다. 아직은 이르다. 그녀는 아직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한쪽 발을 걸치고 있을 뿐이니, 달아나기 전에 낚아채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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