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현 시집『유랑』. 남덕현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과 예리한 직관력으로 사물의 이면을 통찰하는 첫 시집이다. 남덕현의 시는 바람을 탁본한 것 같은 시이기도 하고, 패장이 자결 전에 잠시 꾸는 꿈결 같은 시이기도 하다. 그는 햇볕 잘 드는 운주사 와불 옆에 나란히 누워 서로 이를 잡아주며 ‘이번 생도 배렸다’고 엄살을 피울 것만 같은 불가촉천민적 감성의 소유자다. 그의 시는 도처에 존재하면서도 도처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기를 거부한다. 언어들끼리 서로 스며들어 일체유심조의 체위를 구사하며 시를 낳았음에도 끝내 언어이기를 거부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 아니라 존재가 언어의 집이다. 그러니 태어난 것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잿더미나 송장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