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온 정약용은 잠시 마음의 안정을 회복한 후 주변에 살던 학자들과 활발한 교유를 시작하였다. 신작은 바로 그 첫번째 학자였다.
정약용은 신작과 주로 자신의 저술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는데, 상례에서 시작하여 벽괘설, 육향제 등으로 논쟁점을 옮겨갔다. 정약용이 기왕의 학설에 구애되지 않고 독자적 관점에 따라 경전을 재해석하였던 반면에, 신작은 한학 중에서도 정현 학설을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의 논쟁은 심각한 긴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논쟁은 주로 학문적인 것에 국한되었고, 편지와 시문에는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이나 건강에 대한 염려와 같이 정이 담뿍 담긴 글들을 주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