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이 소설,「베니스에서 죽다」를 읽을때 떠오르는 색은 '회색'과 '빨간색'이다. 꿈(기억)은 무채색이라고 했던가. 독신여성(작중 L선배), 80년대의 학림다방, 더구나 죽음과 함께 사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영화「베니스에서 죽다」까지, 화면은 온통 회색으로만 채워진다. 기억을 함께 더듬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추억을 같이 만든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들은 '추억의' 학림다방에서 같이 영화를 보고, 주인공과 L선배의 과거가 영화와 겹쳐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소년은 '절대미'로 표현되는데, 주인공들과 영화 속 내용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러한 과정의 끝에 별안간 등장하는 '빨간 딸기'는 여태껏 진행되어 왔던 모든 죽음을 일시에 상쇄시키는 효과를 갖는다(어째서 딸기가 등장하는지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꼭 읽어보시길).
작가는 언제나 권력의 대척점에 서서 폭력적 권력에 대한 비판을 진행해 왔으며 또한 그런 완고한 벽 앞에 선 인간들의 내면을 탐구해왔던 이력을 갖고 있다. 그의 이번 소설집 역시 여태껏 이뤄져 왔던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지만, '시간'의 문제를 새롭게 추가함으로써 "시간의 파괴성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라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다가서고 있다. 총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모든 작품에서 작가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