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은 진짜 죄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버지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당한 사람이 죄인인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 이들이 죄인인지.”
-본문 188쪽
속량된 노비의 후예인 누에치는 소년 ‘수리’에겐 한 가지 꿈이 있다. 배부른 머슴이 되느니 쌀독에 거미줄을 치더라도 자유로운 봇짐장수가 되는 것. 그런 수리에게 비단길로 장사를 떠난 아버지는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어느 날 수리네 옆집에 조선 땅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사람인 ‘선암 정약종’이 이사를 온다. 선암은 수리에게 반상의 구별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며 자제들의 이름을 존칭 없이 부르라 하는가 하면 글을 배우려면 세 살배기에게도 부탁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글공부를 부추긴다. 여느 양반들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 뵈는 그에게 수리는 점점 이끌린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식이 깜깜하던 아버지가 ‘천주쟁이’로 잡혀 들어가 생사불명이라는 무참한 얘기가 들려오고, 대궐 주인이 바뀐 조선 땅에 피바람이 불어치는데…….
갓난아이가 군포세를 물고, 까막눈 봇짐장수가 누명을 쓴 채 매질을 당하고, 남을 밀고해야 내가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비정한 시대에 아비를 빼앗긴 열다섯 살 소년과 시대를 앞질러 사랑의 가치를 질문했던 선암 정약종의 가슴 시린 우정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