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지난 12년은 거의 텅 빈 시간이다. 99년 가을이 올 무렵 중국으로 건너갔고, 지난해 봄이 오기전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은 요상하게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마치 마술처럼 지난 10년여를 도려낸 듯 하다. 그때도 경제위기가 오고, 정권이 바뀌고 했는데 당시와 여야와 바뀌었다지만 큰 차이가 없다. 또 어릴 적부터 해태를 응원하던 나는 9차례에 걸쳐 배가 터지게 해태의 우승을 즐겼는데, 돌아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태의 후신인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을 했다. 그때의 포만감 때문인지 우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7차전 9회말 끝내기 홈런은 만끽하기에 너무나 즐거운 꺼리였다.

당시 첫 직장인 ‘미디어오늘’에 들어가니 선배들은 나한테 프레스센터의 자료실에 가서 ‘국경없는 기자회’ 등이 한국 언론에 대해 평가한 자료를 찾아서 기사를 쓰라 했는데, 아마 지금 내 후배도 그런 일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지난해 47위에서 69위로 떨어진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지수는 내년이면 100위권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거기에 내가 들어가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매체에도 내가 입사하기 전에 편집국장으로 있던 선배가 최근 다시 편집국장으로 갔다. 그러니 나에게 지난 십년은 그냥 도려낸 듯한 이상한 허공으로만 느껴진다.

내가 미디어오늘에 간 후 취재해야 하는 출입처에 ‘문화일보’가 있었다. 미디어오늘 당시에는 현대가 지배주주로 있었지만 제법 지금처럼 ‘조중동문’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실력이나 재주로나 의리로나 존경할 만한 분이 많았던 신문사였다. 하지만 지난 가슴을 쥐어뜯던 이들 가운데는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고,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고,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고,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신석정의 ‘꽃덤불’ 패러디)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랑 교분은 없었지만 문화부에서 인문학에 관한 글을 잘 쓰던 한 기자가 있었다. 지금은 중앙일보로 옮긴 조우석 기자다.

그가 최근 ‘박정희 한국의 탄생’을 내놓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요즘 즐겨보는 코미디의 한 코너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로 개그콘서트의 ‘씁쓸한 인생’이다. 이 코너는 우선 보스와 상무의 말장난으로 시작한다. 전형적인 말 장난 개그인 이 코너는 발음이 유사한 단어를 계속해서 나열하는 방식이다. 이 책도 그랬다. 이 책의 저자는 우선 박정희가 60~70년대 한국을 탄생을 이끈 영웅이라는 전제로 시작한다. 그의 과(過)로 언급되는 친일파, 독재자, 지역차별의 원죄자라는 것조차 조차 잘못된 오해라고 말하니 일단 접어두고 들어가자. ‘한반도의 모더니즘’으로 시작해 ‘그와의 싸움, 그와의 화해’로 끝나는 본론 전체는 그 특유의 문화적 이해와 글쓰기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 소위 박정희의 트레이드 마크인 경제성장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좋은 정치 문화적 유산은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두 번째 개그는 보스의 몸 속에 무언가를 넣고 채우는 것이다. 조우석의 글쓰기도 그렇다. 그는 본문에서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수많은 정치, 경제적 혜택이 박정희로 비롯됐다고 본다. 사실 나 역시 박정희가 이 나라 경제의 근간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는 박정희와 지금도 호의호식하는 재벌의 공로가 크다. 하지만 그는 일반 군인처럼 지위관의 모습이었다. 싸움터에는 서독 간호사나 광부, 월남전에 뛰어든 군인 등 우리 인민의 고혈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저자는 ‘울보 박정희’ 같은 이미지로 이들을 모두 감싸안은 박정희를 칭찬한다. 이것저것 박정희라는 구역 안에 모든 것을 쑤셔 넣는다. 심지어는 그의 그늘에 함석헌, 장준하는 물론이고 박노해, 신경숙 같은 작가들도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올림픽은 물론이고 월드컵 4강도 마치 그가 다리를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참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70년 대선이나 수많은 희생자를 낸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은 홍곡(鴻鵠)의 뜻을 모르는 연작(燕雀)에 지나지 않은 셈이다.

‘씁쓸한 인생’에서도 뭉치로 대변되는 우스운 배신 이야기가 있듯이 박정희의 최후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싸움으로 대변된 배신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 배신 이야기는 우스운 에피서드로 끝난다. 저자는 막판에 이시형, 김동길, 손학규, 김문수, 장하준 등을 끌어내면서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 시킨다.

물론 나 역시 그의 논제가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 그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박정희를 보는 정운현이나 백무현, 김삼웅의 의견이 100% 맞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만들어진 박정희는 분명히 아직 살아있는 박정희 세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만든 공감대다. 지금 박정희를 지폐에 넣거나 미국 사우스 다코다 주의 산에 새겨진 대통령 얼굴 같은 모습으로 만들자면 많은 이들이 웃을 것이다. 아직도 인혁당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가슴속에 슬픔을 잊지 못할텐데 그들에게 어떻게 그런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박정희 시대를 지나고 그의 작은 분신들과 같은 전두환과 노태우 시대를 지났다. 물론 김영삼이나 그가 다시 비판하는 전 정권 10년도 지났다. 박정희 같은 시대도 그렇고 어떤 시대도 그렇지만 그 시대는 그 시대의 몫이다. 좋은 것도 당대의 몫이고, 나쁜 것도 당대의 몫이다. 좋은 것만 빼와서 어떤 인물과 결부하는 것은 분명히 견강부회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잃을 때는 그런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백무현의 ‘만화 박정희’나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등의 백신을 주사 받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