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밀라노에는 지금도 안개가 고요히 흐르고 있다.”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궤적을 남긴 밀라노 생활에서 만난 문학과 친구, 도시의 정경을 회상하는 스가 아쓰코의 첫 작품집. 세월과 함께 아련한 기억 너머로 사라진 이들의 흔적을 사려 깊게 더듬어가며, 십삼 년간 거주했던 밀라노 외에도 베네치아, 나폴리, 페루자, 트리에스테 등의 도시와 명소를 돌아보며 받은 감회를 유려하게 풀어냈다. 한 편의 서정시를 연상시키는 표제작을 비롯한 열두 편의 에세이 중 여섯 편은 움베르토 사바, 조반니 파스콜리, 알레산드로 만초니,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등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문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글로 이루어져 있어 번역가와 문학자로서도 익히 인정받은 작가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예순 살 신인’의 데뷔작이라고 믿기 힘든 노련함과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 평가받아 제30회 여류문학상과 제7회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다.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창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_본문에서
스가 아쓰코가 밀라노에서 생활하던 시절의 서유럽은 역사상 인간 정신이 가장 고상하게 발현된 시기였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신분, 학력, 피부색, 국적, 나이, 빈부 너머 사람들의 표정이나 눈빛, 목소리, 마음에 직접 가닿는다. 사람을 그야말로 사람으로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잊게 한다. _송태욱(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