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 두 언어의 골짜기에 끼여 발버둥치던 그 시절.”
일본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시행착오로 가득했던 유학 초기에서 예순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한 현재까지, 인생의 한 시기 찾아왔다가 사라져간 사람과 장소들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에세이. 학회 참석을 위해 향한 베네치아의 호텔에서 아련한 종소리와 오페라의 선율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베네치아의 종소리」, 전쟁의 상흔이 남은 가톨릭계 기숙학교에서의 추억을 재치 있고 생생하게 그려낸 「기숙학교」, 첫 유학지인 파리의 기숙사에서 만났던 독일인 친구와 삼십 년 만에 재회하는 「카티아가 걷던 길」, 병상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등, 총 열두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스가 아쓰코의 작품 중에서도 구성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책 전체에 감도는 애수 어린 분위기와 함께 가족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갑자기 나 자신이 큰 파도에 키가 휩쓸린 조각배같이 느껴졌다. 이곳에 존재하는 서양의 과거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고국의 현재에도 수용되지 못하는 나는 대체 어디로 향해야 할까. 두 나라, 두 언어의 골짜기에 끼여 발버둥치던 그 시절에는 사방에 두꺼운 벽만 가로놓인 기분이라, 그저 몸을 움츠리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_본문에서
스가 아쓰코는 예순한 살로 문단에 등장할 당시부터 이미 완성된 작가였다. 그리고 불과 팔 년 사이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이며 주옥같은 작품세계를 일구어냈다. 유럽과 일본에서의 시간을 부드러운 실로 자유롭게, 동시에 면밀하게 엮어낸 이 책은 ‘잃어버린 시간’과의 융화이자 인생에서 지나쳐간 사람들에게 내미는 화해의 제스처다. 또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그려낸 뛰어난 교양소설이기도 하다. _세키가와 나쓰오(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