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장정이었다. 흥미있는 소설도 아니고, 액션과 서사가 담긴 역사서도 아니고, 과학사에 대한 책을, 그것도 9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완독한다는 것이. 하지만, 선물 받은 책이고, 선물 받기 전에 신문 도서 리뷰 코너에서 흥미있게 보았던 책이라는 점이, 결국 손에 들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전형적인 40대 직장인의 생활 패턴 - 퇴근 후 조금씩 집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 - 도 큰 장애 요인이었는데, 단지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무거운 책을 손에서 내려 놓은 오늘, 뭔가 해낸 것 같다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반복하자면, 흥미있는 소설도 아니고, 액션과 서사가 담긴 역사서도 아닌데, 결론은 그런 책에 못지 않게 흥미롭고 많은 생각을 해 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종교 권력에서의 탈피를 시작한 15세기를 르네상스 시대로, 17세기를 과학 혁명의 시대로 이야기한다. 필자도 이런 관념적 지식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16세기는 뭘까? 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의심을 필자는 이 책의 화두로 시작한다. 삼형제를 예로 들어 보자. 믿음직한 첫째와 똑똑한 막내인 세째사이에 있는 둘째와 같은 16세기. 그것도 막내라는 세째가 지동설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행성 운동의 케플러, 『프란키피아』의 뉴턴, 해석 기하학을 창시한 데카르트, 기체의 압력과 부피와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수식화한 보일이라면? 정말 기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의 결론을 조금 신파조로 이야기하자면,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둘째가 실은 똑똑한 막내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뒷바라지를 한 (정말 전형적인 표현이다)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5세기 르네상스의 기운을 품고 있는 16세기에는 두가지 특이할 만한 사건이 있다. 대항해를 통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실질적 발견, 그리고 인쇄술의 보급이 그것이다. 그런 16세기에 17세기라는 막내를 태동하기 위한 둘째 형님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라틴어만을 고급스럽다고 고집하던 16세기 엘리트 지식 계층이 아니라, 당시로는 천하다는 수작업에 종사한 직인들, 즉 예술인, 선원, 외과의(지금의 의사가 아니다. 이발사를 생각하면 된다. 이발소의 표시가 빨강, 파랑인 것도 이때에 상황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학교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정신과 육체의 대비라고 할까? 육체를 이용한 실질적 지식의 확보는 인쇄술을 통해 퍼져나갔으며, 더 많은 대중이 함께 고민하면서 변혁의 태동을 잉태한다는 것이다. 진보와 발전의 단초는 역시 민중들이 시작한다는 역사의 되풀이되는 예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뉴턴이 "거인의 어깨위에서 세상을 보게되었다" 라고 말하였을 때, 이는 다분히 겸손한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뉴턴은 천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므로, 어찌 보면 일종의 겸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뉴턴이 말 한 그 어께의 주인공이 바로 이 들, 즉 16세기 육체 노동에 종사한 직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과학 기술사에 대하 묘사는, 그런 의미에서 무척이나 신선하다.

저자가 다룬 분야들을 살펴 보자. 16세기 문화 혁명을 이야기 하면서, 17세기 과학 혁명의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우격다짐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는 16세기의 예술, 의학, 해부학, 광산업, 야금술, 시금법, 상업 수학, 군사학, 천문학, 지리학, 기계학을 섭렵해 나아가며 그 논리를 집요하게 전개한다. 분야마다 등장하는, 바로 그 토대를 이루어 낸 직인들은, 함께 제공되는 삽화와 저술들의 인용으로 더욱 17세기의 토대로서의 16세기에 대한 논증의 정확성을 더해간다. 16세기 말, 잉글랜드의 경우에서와 같이 지배 계층이 직인들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가면서 스페인을 압도해 나아가는 이야기에서는, 변화와 진보의 단물을 궁극에는 지배 계층이 흡수해 나아가는 일종의 아이러니도 곱씹어 보게 만든다. 어찌 보면, 수 많은 개량과 실험 데이터를 17세기 전문적인 과학 기술인에게 제공하고, 결국 전문적인 (이 단어는 직인들이 일반 민중이라는 사실과 대비하여 사용하였다) 17세기 과학 집단에게 큰 과실을 안겨 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저자를 통해 알게 되면서 우리 나라의 과학사도 돌아 보게 된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되는데, 한자만을 고집하던 지배 계층에 비해 변혁의 씨앗을 뿌린 것은 중인들로 대표되는 실학파들이었고, 결국 서양에서 수입된 과학과 함께 20세기 이후 과학 전문가들에게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한다. 아쉽게도 유럽에 비해 300여년이나 늦었지만 말이다.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17세기 천재와 같은 과학 영웅들만 알고 있었는데, 역시 천재는 없나 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부단한 노력이라는 누구나 이야기하는 그런 천재가 아니라, 앞선 사람들의 업적에서 가장 적절한 부분들을 취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천재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뉴턴이 말 한 거인들. 16세기 천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던 그 거인들. 그들을 알게 해 준 저자와, 그런 이야기를 품고 있는 걸작을 선물해 준, 단 한 번의 술자리만을 함께 한 지인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올해 말,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될 준비를 하여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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