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 공신이 반란과 역적의 상징으로?
조선 500년이 정도전을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승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의 이면을 파헤치다!
사육신 성삼문은 만고에 길이 남을 충신으로 기억되지만 사실은 그 머뭇대는 태도로 단종 복위 거사의 실패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임진왜란 때문에 무능함 전형으로 남아 있는 선조가 사실은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처음 주창했으며, 사서삼경을 한글로 번역해 한글의 지위를 격상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왕위를 찬탈했던 세조가 불안했던 자신의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술자리를 베풀어야 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을까?』는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던 조선 역사 속 56가지 사건을 정사와 야사의 분석과 비교를 통해 새롭게 재구성한다. 나아가 조선 역사 속에서 현대사를 투영해 오늘의 역사를 반성한다.
◎ 도서 소개
사필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의 손 끝에서 쓰여진 조선의 역사, 그 이면에 담긴 역사 속의 진실 혹은 거짓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조선 초 최고 실세였던 정도전이 이방원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제거되고 500년이 흐른다. 그 시간 동안 정도전은 단순히 태종 왕권 획득의 걸림돌로부터 반란을 일으켰던 대역 죄인들도 동급으로 언급되는 것조차 꺼려하는 반란과 역적의 상징, 간신의 대명사로 변해 버렸다.
지금은 군신공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던 현자로 기억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 시대의 역사서 속에서는 사정없이 난도질당했던 정도전.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살해된 정몽주도 태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세조에 반대해 목숨을 버린 사육신 성삼문도 오래지 않아 복원되었다. 똑같이 군신공치를 실현하려 했던 우암 송시열 같은 이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성자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정도전만이 조선 500년 역사 동안 몰락을 거듭했던 걸까?
서술자의 주관이 담긴 사실(史實)을 이야기하는 역사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다. 뛰어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던 조선인들은 역사를 장악하는 것이 권력 정당성을 위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장악하려 투쟁했고, 다양한 개인 문집을 쏟아냈던 것이다. 때문에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입장에서, 신권이 강할 때는 신하의 입장에서, 혹은 정권을 잡은 정당의 색에 따라 성군(聖君)과 혼군(昏君), 명신과 간신이 갈린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역사는 그들을 왜 그렇게 기록했고, 왜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기억할까?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을까?』는 정사 『조선왕조실록』과 야사 속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기록된 56가지 흥미로운 일화들을 정사와 야사의 비교, 분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논한다.
붕당의 뿌리가 되었던 이이나 이황은 오랫동안 추앙받았지만 조선 최고의 명정승이었던 이준경은 조선 후기의 당파 논리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져 버려야 했던 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정조가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전개하여 자신의 왕좌를 스스로 위험에 몰아넣었던 사실, 권력자들이 정사를 장악하기 위해 했던 노력 등 지금껏 역사서에서 읽지 못했던 다양한 사실들을 재조명하며 조선 역사 전체를 복원해 나가는 저자의 솜씨는 놀라울 정도다.
정사와 야사는 전체로서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두 개의 눈이다. 독자들은 이 두 가지 눈을 통해 새로운 조선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대를 반추한다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을까?』는 조선인들의 뛰어난 역사의식 속에서 태어난 조선의 정사와 문집들을 분석하며,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 특유의 민감한 통찰력으로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현대와 맞물리는 지점들을 깊이 있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500년 내내 강대국 명, 청의 파병 요청에 시달리던 조선 왕들이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해야 했던 모습은 현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 실록이 전하는 강대국의 청병에 대한 최선책은 결국 세종이 말했던 그대로다.
‘최대한 버티되 불가피하면 성심껏 임하라!’(-p 99)
이와 같이 저자는 조선 역사와 현재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꺼리’를 제공한다. ‘군주 국가’ 조선의 통치자 군주를 다룬 1장에서는 조선 왕 개개인의 통치 특성을 알아본다. 2장에서는 조선을 이끈 국왕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그 힘을 행사했는지, 또 잘못 행사하여 어떤 비극을 만들어냈는지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최고 권력자의 파워 문제는 지금도 생생하게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3장에서는 지존(至尊)인 국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다양한 삶의 제약을 받아야 했던 왕실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보일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행태들을 그린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욕이 억제될 때 과연 어떤 본능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지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4장에서는 조선 정치 형성에 기여한 인물들을 선별해 조선의 정치 세계를 맛볼 수 있도록 했으며, 5장에서는 국왕을 뒷받침했던 관(官)의 세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한다. 조선시대 관가를 엿보면 진정한 관리상은 언제 어느 때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장은 말 그대로 조선 사람들 중에서 기인이나 특출난 인물들을 뽑아 보았다. 거기서 조선 사람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7장은 말 그대로 조선을 반대한 사람들에 대해 다뤄, 조선 백성들이 나라를 혼란으로 빠뜨리려는 위정자에게 어떻게 항의를 표시했는지, 권력을 쥔 자들이 민심의 향방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본문 중에서
조선 사람이 오늘날의 한국인보다 뛰어난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역사의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의식이란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세를 말한다. 조선이 고려 500년 역사를 총 정리하는 작업을 완성한 것이 1451년(문종 원년)이다. 조선이 탄생한 지 정확히 60년 만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한민국 탄생 60년이 넘도록 조선 500년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60년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여전히 역사를 둘러싼 지식인 사회의 전쟁이 한창이다. -p 9
이이는 주희와 함께 서인들이 ‘영원한 영수(領首)’로 받는 인물이다. 반면 류성룡은 남인 쪽 인물이었다. ‘10만 양병설의 주인공=이이’라고 하는 것은 서인들이 국가의 장래를 미리 걱정해 계책을 마련했다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야사는 정사와의 정밀한 비교를 통한 해체(解體) 독해(讀解)를 할 때 그 실상을 잡아낼 수 있다.-p 19
이후 경복궁은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중수할 때까지 힘없는 왕실을 상징하듯 폐허처럼 남아 있었다. 오랜 논란 끝에 대원군은 6년여 공사를 거쳐 고종 9년 경복궁을 중수했다. 전소된 지 270여 년 만이었다. 고종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경복궁 중수로 고종의 왕권(王權)은 강화됐지만, 결국 고종 때 국권(國權)을 잃고 말았다. -p 49~50
이런 불만 속에서 영화 『신기전』을 본 적이 있다. 여기서도 세종이 명나라와의 일전도 불사하는 군왕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세종의 대명노선이 그냥 사대도 아니고 ‘지성사대(至誠事大)’였음을 안다면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설정이다. -p 63
정조는 즉위하는 첫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곧바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던 조정 신하들을 대거 숙청했다. 그 방식도 무자비했다. 그 바람에 정조는 재위 10년이 넘어설 때까지 해마다 대규모 역모나 반란 기도에 시달려야 했다. -p 75~77
가장 논란이 되는 대리청정은 영조 25년(1749년), 15살의 어린 나이에 중책을 맡아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경우다. 15살의 어린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강행한 것부터가 의문이다. 참고로 문종이 대리청정을 했을 때 나이가 32세, 경종은 24세, 광해군은 19세였다. 선조보다 정통성이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무수리의 아들’ 영조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어린 아들마저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p 115
남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두 중종의 후손이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선조 이후의 조선 왕실은 고스란히 안씨의 후손이다. ‘창빈’으로 추존된 것도 선조가 임금이 되고 나서 이뤄진 조치였다. 뒤늦은 지적이지만 그는 한미한 집안의 궁녀 출신으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창빈 안씨’로 나올 수 있을 만한 신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역사의 승리자는 문정왕후도, 경빈 박씨도, 정난정도 아니다. 창빈 안씨다. -p 118
조선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경우 대체적으로 전반기에는 왕권이 강했고 후반기에는 신권이 강했다. 왕권 대 신권의 강약은 역사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전반기에는 태종이나 세종처럼 선대의 기록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후반기로 가면 아예 신하들이 이미 완성된 실록을 다시 써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신권 강화로 인한 당쟁의 여파였다. 이제 역사 서술을 둘러싼 싸움은 임금과 신하가 아니라 신하와 신하 사이에서 일어난다. -p 126
특이하게도 수정의 범위가 가장 미미했던 『숙종보궐정오』를 제외한다면 역대로 실록의 수정, 개수, 수정 등의 작업을 추진한 세력은 다름 아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이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역사를 장악해야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실제로 조선 후기는 서인, 노론의 시대였다. -p 128
‘우리나라의 문헌이 부족하여 지금 울릉도의 일에 있어 고증(考證)할 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전후의 문적(文蹟)을 널리 채택하여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사대(事大) 교린(交隣)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홍봉한의 말 중에서 ‘울릉도’를 ‘독도’로 바꾸면 지금 상황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그만큼 치밀한 연구 조사와 국민들에 대한 계몽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p 312
물론 이괄의 난은 군사 작전의 성공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민심의 동향을 보면 인조와 조정이 승리했다고 하기는 힘들다. 인목대비까지 나서 의병이 궐기할 것을 백성들에게 당부했지만 그런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이괄이 한양에 입성할 때 백성들이 길을 닦고 황토를 뿌려 임금의 예로 맞았다는 사실은 이미 이때부터 조선이 뿌리에서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p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