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에서 맑스에 이르기까지, 두더지는 집요하게 길을 터 가는 자를 지칭하는 은유이자 지하에서 솟아나오는 은밀한 저항과 돌연한 출현을 지칭하는 은유였다. 두더지는 역사의 짙은 어둠 속에서 끈기있게 통로를 파 나가다가 이따금 작열하는 사건의 섬광 속에서 돌연 대명천지로 올라온다. 두더지는 '역사의 종언'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저항의 화신이다.
'일반 두더지학에 대한 시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루이 알튀세르, 알랭 바디우, 자크 데리다, 안토니오 네그리, 프랑수아즈 프루스트 같은 위대한 현대 철학자들을 통해서 두더지같은 저항의 철학적 형태를 탐구한다. 20세기의 재앙들이 기왕의 거대한 희마을 무너뜨렸다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럴 수록 역사와 사건의 관계를 판독하는 일은 더욱 더 긴요하다. 냉혹한 운명을 자처하는 경제의 부조리, 이를 거역하는 정치적 행동은 바로 이 역사와 사건의 관계에 뿌리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