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없는 성장소설.

배수아의 「바람인형」에 한 평론가가 했던 말이다.

박향 작가의 「얼음꽃을 삼킨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성장하고 싶지만, 성장할 수 없는 인간. 소녀/소년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구조인가, 자신인가. 이 소설에서 소녀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구조이다. 1970년, 1980년 부산.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날, 나라가 끝날 것만 같다고 생각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에게 사회 선생님은 잘 된 일이라고 했다. 유신의 심장을 겨눈 총알 한 발로 대한민국은 전진하리라 말했다. 무엇이 진실일까.

수희, 그녀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희망을 믿는다. 아무리 각박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주인공은 마침내 성취한다, 밝은 미래를.

이런 식의 헤피 엔딩은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보다 소설에서 보기 힘들다. 소설은 균열을 먹고 산다고 해야 할까. 균열은 현실 곳곳에 존재한다. 사랑, 희망만 믿고 살기에 세상에는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하다. 폭력이 편재하고 부정의가 판을 친다. 착하게 살았는데, 아침에 깨닫는다. 속았구나.

이런 현실에서 수희는 성장한다. 아버지는 우체국 공무원. 어머니는 주부. 두 언니와 한 명의 오빠가 있다. 엄마는 오빠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두 언니의 고등교육을 포기한다. 그 시절에 흔한 광경이다. 갑자기 아버지가 죽는다. 큰 언니는 첫사랑에 실패하고 어렵사리 만난 사람과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정신병원행.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한 오빠는 아니나 다를까, 학생운동에 가담하고.

엎친 데 덮친 격. 단련 안 된 허벅지에 마사토 로우 킥 100번 맞은 느낌. 이런 상황에서 초등학생인 수희는 어떻게 자랄까. 누군가 말한다. 그래, 그때가 좋았지. 주인공은 답한다. 어린 시절이 좋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행복하거나 자기기만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아버지가 죽고. 언니가 정신병원에 가고. 기타 등등의 비극적인 사건은 지나친 스포일을 막기 위해 생략하겠다. 아무튼 이렇게 힘든 시련을 소녀는 어떻게 견뎌낼까. 소설은 고통의 치유 과정을 묘사하진 않는다. 작가는 그저 끊임없는 시련의 나열을 묵묵히 써내려간다.

수희의 고난은 개인적이지만 정치적이다. 수희 주변에서 일어나는 초등학교 폭력의 현장,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여성의 감정을 유린하는 가부장제 권력, '순결' 이데올로기를 내재한 여성의 죄의식, 이 모든 사건이 군부독재라는 상황에 스며들어 '인생, 원래 그런 거야'는 허무주의와 무기력함을 표현했다.

작가 자신이 어떤 의도로 글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결론은 명쾌하다.

성장없는 사회에서 성장소설은 불가능하다.

덧. 박향 작가를 「부산을 쓴다」에서 처음 만났다. 부산일보를 통해 등단한 만큼, 부산이라는 지역성에 애착이 강한 작가인 듯하다. 사실, 이 작품을 보고 싶었던 이유도 '부산'이라는 소설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부산의 지역성은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작중 인물이 모두 표준어를 쓰고, 부산의 지역을 훨씬 더 촘촘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