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누보 로망의 교황이라 일컬어지는 알랭 로브그리예가 여든 살 때인 2001년, 20년 만에 발표한 신작 소설.
배경은 1949년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폐허가 된 베를린. ‘나’는 프랑스 비밀정보국의 요원으로, 모종의 임무를 띠고 베를린으로 온다. ‘나’는 처음엔 ‘앙리 로뱅’이라고 불리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점차 ‘H. R.’, ‘보리스 발롱’, ‘보리스 로뱅’, ‘아쉐’, ‘발’ 등의 대여섯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앙리 로뱅은 자신과 너무 흡사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와 똑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을 목격한다...
처음에는 스파이, 암살, 미스터리와 같은 요소로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추리소설의 분위기를 풍기다가, 뒤로 갈수록 환각, 분신, 근친상간, 사디즘, 페도필리(소아성애)가 뒤범벅된 기괴스러운 에로티시즘 소설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일관되고 의미 있는 소설 형식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모순과 균열, 혼돈과 결핍을 추구하는 로브그리예 소설답게, 서술 형식에 있어서도 독자를 잔뜩 긴장시키는 난해함을 이루고 있다.
누보 로망이라는 것 자체가 사건과 캐릭터가 일관성 있는 소설이 과연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에서 나온 것인 만큼 일반 독자들에게는 약간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새로운 소설, 새로운 감각을 원하는 첨단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고급 문학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