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양의 책을 읽진 않는다.

다만, 몇 권의 책을 두고 그 것을 시간이 지날 때 마다 다시 몇 번씩 정독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기준에 있어서 독서란 내 마음의 양식이 부족하여,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 그 것을 충족시켜 줌으로서 마음을 순수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몰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일까. 자랑은 아닌 일이지만, 이런 생각이 핑계에 불과하다 하여도 결국은 이 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독서'의 의미이므로, 남들처럼 해박한 지식은 없으나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한 한 권의 동심에 대해 지금부터 조심스레 털어 놓으려 한다.

어린 왕자[Le Petit Prince].

- 마음으로 가능케 하는 진정한 독서 -

나는 이 것을 책, 혹은 소설이라기 보다 어떠한 동심의 대화로 써 내려간 순수의 '동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어렸을 때의 나에게는 사고의 자유와 발상의 전환을, 어른이 된 지금이 나에게는 때묻지 않은 순수함의 깨달음을 안겨주는 것이 바로 이 어린 왕자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 그들의 시선이 보편적인 것이고, 마치 그 것이 어떠한 법률 또는 규율인 것 마냥 따라야 한다고 배워왔던 나에게 어린 왕자는 신선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그 와의 엉뚱한 만남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시작 되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막에 떨어진 조종사에게 갑자기 나타난 한 소년, 그는 대뜸 양을 그려달라고 한다. 아주 아주 예쁜 양으로..그에게서 종이와 펜을 받은 순간 나는 이미 조종사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 사막 한 가운데에서 뜬금없이 양을 그려달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임이 분명했지만 나는 양을 그려 주었다. 그러나 세 번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며 그려준 양은 모두 그 소년의 맘에 들지 않았고, 마지막 포기하는 심정으로 대충 그려 낸 구멍 뚫린 상자를 보고서야 소년은 매우 흡족해 한다. 이 장면은 맨 처음 보았던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과 다를 바 없는 순수함의 극치를 느끼게 했다고나 할까. 이것은 마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사람도,사물도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그 안에는 또 알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고, 어린왕자는 어느새 내게로 다가와 소곤히 속삭이고 있었다. 그 양은 얼마나 작고 예뻤을까..한 장 한장의 동심의 책장을 넘기며, 나도모르게 미소를 띄웠다.

이 것은 나뿐만 아니라, 어릴 적 보아 뱀 그림에 대한 어른들의 실망감에 미술의 꿈을 접은 조종사의 마음 속, 그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동심 또한 꺼내어 보였으리라.

친구가 된다는 것, '꽃' 이상의 의미.

이렇게 우리는 둘이고, 셋이었다.

셋이서 길을 걷다가도 나는 조종사의 마음에 담기었다가, 다시 어린왕자의 마음에담기었다가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각박한 현실 속의 내가 되어 걸을 땐 셋이었고, 동심 속의 나와 걸을 땐 나는 둘 중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담기어 있었다. 어린 왕자는 사막에 앉아 자신이 다녀 온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권위가 존중되기를 원하는 왕이 사는 별,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사는 곳, 자신의 슬픔을 잊기 위해 술만 진창 마시는 술꾼이 사는 별, 쉴새 없이 숫자를 더하고 빼는 일만 하는 실업가의 별, 하늘의 한구석에서, 가로등과 가로등 켜는 일 만하는 사람이 사는 별, 지구를 추천해주는 지리학자가 사는 별..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장미와 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더 크게 귀를 기울였다. 장미 꽃 한 송이에게 들인 정성과 노력. 그 것은 정원에 피어난 오 천 송이 장미 꽃들 보다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바로 친구가 된다는 것이 그러한 의미였다. 어디에나 피어있는 화려하고 자신을 뽐내기 바쁜 꽃들은 그저 의미없는 '꽃'에 불과 했지만, 어린왕자의 곁에서 피어난 한송이 장미 꽃은 단순한 꽃의 의미를 넘어선 그 이상의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마음으로 볼 때 더 빛나는 그 것, 우리는 그 것을 눈에 보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말한다. 단지, 연인의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 뜻은 알고 있으나 표현하지 못 할 뿐, 사람과 사람사이, 혹은 사람과 사물 사이에 느끼는 그 어떠한 따뜻하고 미묘한 감정을 모두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통해 서로가 길들이고,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느끼게 했다. 어린왕자가 장미 꽃과 친구과 되는 과정에서 느껴지 듯, 우리가 살고 있는 동화 밖의 세상도 그만큼 순수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유대관계 즉, 더불어 사는 삶의 고마움이란 무엇인지, 흙의 고마움이 무엇인지, 나무의 싱그러움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물의 소중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모르고 사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그러한 동심으로 와 닿았으면...

'기다림'과 '길들여진다'는 것.

여우에게 길들여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인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서 비로소 자신이 오랜 시간을 바쳐 키워 낸 장미 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을 향해 한 없이 설레이고 들뜨는 기분. 기다린다는 것은 혼자여서 외로운 일이지만 사실은 외롭지 않은 것. 외로움을 견디게 해줄 행복 속에 빠져 내가 외롭다는 사실 조차 망각하게 하는 신비로운 일이었다. 어린왕자가 매일 자신을 길들여 주기로 한 시간이 될 때까지 가슴이 부풀고 심장이 정신없이 뛰어서 행복했다던 여우처럼.

헤어짐의 뒤에는 기다림과 길들여짐의 즐거운 굴레 속에서 벗어나야하는 아쉬움이 찾아오지만, 적어도 기다리는 동안의 그 설레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린 왕자가 다시 별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전해들은 이야기 속에서 담은 느낌을 그대로 떠올려 그를 조용히 보내주었다. 그가 부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눈을 감은 것이 아니기를, 반드시 자신이 살던 별로 돌아가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와의 헤어짐을 맞이할 때 쯤에서야 그의 이야기 속에 길들여진 나 자신을 비춰보며 나는 마지막 순수의 장을 천천히 넘겼다. 그는 자신의 별로 돌아 갔지만 내 가슴에 남겨진 또 하나의 별, 그 별은 그와 함께한 동심을 간직한 채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찬란히 떠 있으리라.

내가 더 나이를 먹어 마흔이 되고, 칠십을 넘긴 노인이 돼 있을 때에도 그 별은 가슴 어느 한 곳에서 지난 추억을 되새기며 희미하게나마 빛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순수, 그 짧은 만남을 영원히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