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남의 사진기에 마음을 열어준 예인들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거나 인생의 황혼기를 넘긴 지 이미 오래되었다. 운명적으로 혹은 본인의 열망에 의해서 무당, 소리꾼, 춤꾼, 광대로서의 삶을 택한 그들을 이제는 예인이라는 명칭으로 대접해주지만, 구한말과 일제시대, 한국전쟁 같은 격변의 시기를 지내오면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범인의 삶에 비할 수가 없다. 가난이야 두려울 게 없었지만, 근대화 과정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행되어온 사회적인 천대와 무관심이야말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 정권의 독재와 새마을운동, 미신타파의 분위기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예술적인 끼와 재능을 억누를 수 없어 전통예술의 실낱 같은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세상이 그들의 가치를 몰라주고 외면하던 시절, 촌각을 다투는 신문사의 기자일을 하면서도 김수남은 사라져가는 민속문화의 원형을 담아내겠다는 신념 하나로 시간을 쪼개고 다리품을 팔며 그들을 찾아 전국의 골골샅샅을 헤매고 다녔다. 모날 모시 모처에서 굿을 한다거나, 놀이를 논다는 소문 하나를 단서로 굿판과 놀이판을 찾아나섰다. 택시가 한 대밖에 없는 섬에서는 경운기를 타고 진흙길을 달렸으며, 촌부들과 탁주 한잔 걸쭉하게 나눠 마시기 전에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법이 없었다. 민초들의 삶과 정서 속으로 그가 먼저 빠져들었고, 그 자신이 정에 겨워 눈물을 흘리곤 했다. 어린아이 같은 그의 순수한 눈물에 큰무당은 경계심을 풀며 술잔을 먼저 권했고, 예인들은 춤과 노래로 오히려 그를 달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