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재능 있는 화가가 아니라, 천재 화가였다!”
아름다운 무희와 목욕하는 여인들의 은밀한 광경에 몰두했던
드가의 일생과 작품 세계를 파헤치다
파리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해서 ‘신(新)아테네’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그 지역은 오귀스트 드 가와 같은 은행가들을 포함해 명망 있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의 장남 일레르 제르멩 에드가는 1834년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학업성적은 그런대로 좋은 편이었지만, 드가는 열의가 없는 학생이었다. 말수가 적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으며 세상사에 초연한 듯 멍하니 공상의 세계에 빠지는 일이 허다했다. 수업이 끝나면 드가는 아버지와 함께 당대의 유명한 미술수집가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는데, 이 경험이 그에게는 학교 교육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그림에 빠져들었고 법과대학 학기 중에도 내내 작품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드가는 1856년부터 이탈리아에 머물며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보았고 수많은 화가와 그들의 그림을 접했다. 이탈리아 체류는 화가로서 드가의 출발을 알리는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파리의 널찍한 스튜디오에서 살롱전에 출품할 대규모 역사화 제작에 몰두한다. 작업에 온 정신을 빼앗긴 드가는 남들에게 냉정한 인상을 주었고 그의 퉁명스러움은 그때부터 이미 유명했다.
가만히 앉아서 일하기를 좋아하고 사생활에 신중한 드가의 생활태도 덕분에 별다른 소문거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의 노트에 잠깐 언급된 사연(어떤 여자에게 퇴짜를 맞고 나서 그녀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적어놓았다)이나 편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자신의 열정과 결혼 계획 등) 그리고 그에 대한 짓궂은 소문 몇 토막이 전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애정생활은 대부분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면 손발이 뒤틀리는 심한 고통이 다시 계속된다. (…) 연습은 속도를 더해가고, 무희들은 리듬에 맞춰 다리를 번쩍번쩍 쳐들고, 벽을 따라 설치된 무용 봉을 꽉 붙잡은 채, 발레화를 신은 발을 바닥에 콩콩 구른다. 입가에 자동인형 같은 미소를 머금고서….”
〈피오크르 양의 초상〉 이후 무대와 무용수라는 주제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당시 드가는 오페라좌에 드나들었지만 정식 회원은 아니었고, 무대 뒤에서 무희들을 구경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것도 아니다. 실제 연습 장면이나 공연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그려왔기 때문에 정확한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그는 오페라좌에서 무용 시험을 치는 날 들어가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1870년대 초부터는 발레 그림을 부쩍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왜 이런 주제를 택한 것일까? 아마 오페라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관현악단 연주자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자신이 얼핏 보았던 특별한 세계를 갈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가가 ‘무희의 화가’가 된 특정한 시점이 있다면, 그가 기법의 혁신을 위해 끝없는 연구를 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기법을 폭넓게 구사하면서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무희의 그림을 무수히 그렸다. 이제 그는 무대장치 뒤로, 기쁨이 없는 연습실이나 무희들이 몸을 녹이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후원자들과 잡담을 주고받는 후미진 곳으로 따라 들어간다.
이외에 세탁소 여직공들, 카페 콩세르의 가수들, 매춘부들 등 여러 계층의 여자들이 계속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드가는 다시 한 번 동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리얼리즘 속으로 빠져들지만, 이런 주제에 대한 그의 대담하고 솔직한 접근은 선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꾸준히 여자들의 그림을 그렸고 나체화도 많이 그렸다. 당시에는 그의 나체화들에 표현된 가차 없는 사실성 때문에 화가의 잔인한 시선이 비판을 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드가가 여자를 동물로 여기고 그들의 무의식적이고 노골적인 행동을 관찰해 대중 앞에 그대로 드러내 보인 엿보기꾼이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견해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1890년대부터 드가는 점점 더 자기 속으로 침잠하며 세상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게 된다. 1907년쯤에 이르러서는 그의 시력이나 청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마치 ‘펜싱을 하듯’ 파스텔을 휘두르며 그림을 그릴 지경이었다. 새로 일어나고 있는 아방가르드 운동과도 관계를 끊고, 고독 속에 파묻혀 점점 장님이 되어가던 드가는 서서히 세상에서 물러나 멈칫거리는 걸음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그는 말년이 되어서도 매사에 집요하고 엄격하기까지 했던 청장년 시절의 결의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쉼 없이 새로운 장을 개척해 나갔고, 관습에서 벗어난 표현 양식과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충동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리고 1917년 12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눈을 감기 직전에 그를 본 친구 바르톨로메는 마치 말년의 호메로스처럼, 영원을 응시하고 있는 그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아름다웠다”고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