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시기 세계화 과정의 역사를 번역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이해한 책이다. 근현대 과정에서 이루어진 번역의 역사를 조망해보면, 우리나라는 외국어라는 외적 충격의 상황에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우리는 외국어의 충격을 외래어의 생산이라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소화했고, 그 소화된 언어들은 오늘날 정신적·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번역어 생산 과정은 문화적 자산을 생산하는 과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새로운 사회문화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 설비를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격동의 근현대 시기에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문화와 사회의 전반적인 방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의심은 문명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 3국은 서양의 군사력과 과학기술 앞에서 역사적 자부심이 무너져 내렸고, 고통스럽지만 서양식으로 문명개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근대화의 물결에 편입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근대화 과정을 추진해나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전통적 개념이 근대적 가치에 따라 전복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쳤던 개인과 사회·자유·정치와 경제·법·국민과 민족 등의 용어를 살폈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주요 번역어 몇 가지를 살피면 아래와 같다. ‘개인’이라는 용어는 동아시아의 전통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생소했다. 개인은 자연법적 인권을 가진 개체로서의, 이미 근대적 가치를 지닌 용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개념의 개인이라는 용어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19세기, 동아시아에서는 20세기가 되어서야 사용되었다. 한편 동아시아 국가에서 종교나 지역 공동체를 의미하는 ‘사회’가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라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이다. ‘자유’는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종종 방종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개인의 핵심 가치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사용될 수는 없었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생각과 근대적 가치를 도입하려는 생각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자유가 군신관계 등 인륜적 관계로 유지되어온 동아시아 사회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자유라는 용어는 일반화된다.
‘정치’는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정복, 지배와 통치를 의미했지만, 서양에서의 기원은 도시공동체에 관한 일을 의미했다. ‘경제’는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정치와 유사하나 군민관계에 입각한 다스림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가정경제를 의미했다. 결국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정치를 의미할 때 경제 대신 정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대신 경제는 재화에 대한 관리를 의미하는 새로운 용어로 정착했다. 결국 용어는 시대적 산물이다. 문명이라는 개념의 전변을 통하여 근대적 국민을 형성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근대화를 조만간 불가피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로 인식했다. 그리고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번역어가 겪은 우여곡절은 전통과 근대의 대립항이 빚어내는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