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좋아해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갑자기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본가에 들어가게 된 유다연.
이사 당일, 낯선 남자가 안방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당황하지만, 동생 다형은 걱정 말라며 그 남자 신서준은 잘나가는 모델에 ‘게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서준은 마치 예전부터 다연을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듯 행동하는데……. 이 남자, 정말 게이가 맞는 걸까?
“어릴 때랑 많이 달라졌네요.”
“…….”
“눈도, 코도, 입술도.”
“…….”
“분위기도, 표정까지도.”
“못 알아볼 만큼, 아주 많이.”
2. 미리 보기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말을 다연은 실감했다. 처해진 환경에 생각보다 쉽게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돈을 빌려줘서 고맙다는 이유로 안방을 덜컥 내어준 다형의 무모함도, 그 무모함을 쉽게 승낙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마저도 이젠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아직까지 세탁한 속옷을 방에 널어야 하는 불편함까지는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욕실에서 나온 다연은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 놓인 드럼 세탁기에 속옷을 넣은 후 다연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 끝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어젯밤 다형에게 함께 합숙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전달했다. 창고에 놓은 드럼 세탁기는 다연의 것, 베란다에 놓인 큰 세탁기는 남자들의 것. 각자의 빨래와 설거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것. 각자의 방 청소 또한 각자가 할 것. 단, 거실은 이틀에 한 번꼴로 돌아가면서 할 것. 이 내용이 남자에게 전해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용도실에서 부엌으로 나오자 은은한 커피 향이 다연의 코끝에 닿았다. 자신이 다용도실에서 나올 즈음이면 남자는 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만 부엌의 싱크대에 기대서서 커피를 마시는 평소와 달리, 오늘은 거실에 선 채이다. 남자는 벽면에 걸린 액자의 한 부분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다연은 남자에게 아는 척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한 달간 한집에서 거주할 사람이자, 다형의 지인이라면 적당히 가깝게 지내는 게 좋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남자에게 향하는 발걸음이 자꾸만 머뭇거려졌다. 현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수려한 외모와 체형을 갖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남자가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흰 스웨터에 검은 커피잔을 쥐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커피 CF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다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또 그쯤에 서 있네요.”
“…….”
“말 걸기도 애매하고, 인사를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기도 애매한 거리.”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늘어났다. 그러자 차갑게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금세 소년처럼 순수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역시 모델은 다르구나.
다연은 몸을 휘감는 기묘한 느낌을 떨쳐내며 성큼 한 발 내디뎠다. 눈이 마주치기도 했고, 어쨌든 한 달간 마주할 사이라면 적어도 통성명 정도는 해놓는 것이 예의였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여서 말 걸기가 어려웠어요.”
“그 핑계를 대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그럴 리가요.”
다연은 뜨끔한 속내를 감추며 웃었다. 동시에 남자의 얼굴에 즐거움이 떠올랐다. 남자의 미묘한 표정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다연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바쁜 거 아니면 잠시 이야기 나눠요. 당분간 함께 살 텐데 서로 소개는 하고 지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죠.”
“이름이 뭐예요?”
“신서준이요.”
이름을 말하며 남자가 눈을 내리깔았다.
웃는 남자의 얼굴이 야릇하게 보일 줄이야.
다연은 최대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이름이 멋지네요. 나이는 다형이보다 많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스물여덟 살이요.”
“직업은 들었어요. 모델이라고요. 어쩐지 평범하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제가 너무 질문만 했네요. 제 이름은…….”
“유다연.”
자신의 이름이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 잠시 멍하게 있던 다연은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전화 받아요, 유다연 씨.’라고 했었다. 다형의 지인이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그녀가 놀란 것은, 그가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이 무척 듣기 좋았다는 거였다.
“제 나이는…….”
“29세.”
남자가 그녀의 소개를 번번이 가로챘다. 잠시 당황한 다연은 이내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이미 다형이한테 다 들었나 봐요. 소개할 것도 없이 다 알고 있으시네요.”
“관심이 많거든요, 그쪽한테.”
서준의 말에 다연이 놀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남자의 장난에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했다고 여기며 다연이 웃었다.
“나이는 내가 많네요. 누나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세요.”
“그럴게요. 다연 씨도 절 편하게 느꼈으면 좋겠네요.”
말속에 뼈가 있다고 느낀 건 기분 탓일까.
“노력할게요. 그런데 여기서 뭘 보고 있었던…….”
자신을 올곧게 응시하는 갈색 눈동자를 피하기 위해 다연은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러나 다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소파가 놓인 벽면에 가족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중학생 시절에 찍었던 가족사진이 아직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줄이야. 다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끄럽네요. 오래전 사진이 아직까지 여기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뻣뻣하게 굳은 입술 끝을 억지로 올리며 다연이 말을 꺼냈다. 그러나 서준은 대답은커녕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연은 남자가 아주 잠깐 흐트러진 자신의 표정을 알아챈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 순간 남자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한 걸음 정도 벌어진 거리에서 서준은 다연을 바라보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저지할 틈도 없었다. 오히려 눈이 마주친 순간 시선에 얽매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당혹스러움에 흔들리는 다연의 눈동자와 달리, 서준의 고요한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랑 많이 달라졌네요.”
“…….”
“눈도, 코도, 입술도.”
“…….”
“분위기도, 표정까지도.”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아침의 거실, 서준의 시선이 느릿하게 다연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의 시선이 다연의 입술을 스쳤다. 오싹할 만큼 야릇해졌다.
“못 알아볼 만큼, 아주 많이.”
“…….”
서준이 천천히 허리를 곧게 펴더니 싱긋 웃고는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옷자락이 스치며 바람이 일었다. 그제야 다연은 자신이 숨도 못 쉰 채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등 뒤로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얼음이 되었다가 이제 막 녹은 것처럼 다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서준이 들어간 방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다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서준은 사진 속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해서 말하는 것일 거다.
「어릴 때랑 많이 달라졌네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말은 오래전 자신을 알던 사람 같은 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