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나긴 사연의 순간들이 있다.
알베르 카뮈, 로맹 가리 등과 시대를 함께해온 프랑스 현대문학의 산증인 로제 그르니에. ‘프랑스의 체호프’라는 별칭에 걸맞게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 속에 백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써온 그가 2012년 새 소설집을 발표했다.
삶의 덧없음을 애틋하게 인식하며, 그 덧없음 때문에 더욱 귀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온 작가의 이번 작품에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린 노인의 써늘한 자살시도,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 광고판을 등에 지고 진종일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인 샌드위치맨과 그를 바라보는 옛 동료의 거울과도 같은 시선, 유년 시절에 처음 만나 인생이 저물어가는 날까지 삶의 행로가 서로 마주치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두 남녀의 일생 등이 담겨 있다.
이번 단편집에 실린 열세 편의 단편들은 남달리 긴 인생행로를 거쳐온 작가가 저만큼 거리를 두고 ‘붕괴되어가는’ 삶을 향해서 던지는 때로는 매섭고 때로는 유머러스하며 또 때로는 연민 가득한, 그러나 언제나 투명한 시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단편소설에서 삶의 ‘붕괴’는 너무나도 긴 세월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이어서 인물들은 가끔 그것이 사랑이라고, 행복이라고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거기 세월에 바래고 삭아버린 삶 전체를 굽어보는 작가의 차디찬 시선이 나직하게 위로하듯 절망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