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모습을 드러낼 당시, ‘미래파’라 불리는 시인들의 들머리에 놓인 시인 여정의 두 번째 시집. 처음 출현했을 때부터 그의 시는 시사의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어와 빛나는 감수성으로 고통을 눅여낸 몸의 풍경을 그려내 문단의 찬사를 받았다.
『벌레 11호』에 수록된 그의 시는 추상어와 감정어들에 기대지 않고서도 삶의 저 아래에까지 닿는 눅진한 정서로 가득하다. 말은 간명하고 이야기는 정제되어 있으나, 거기서 얻어지는 감각은 실로 폭발적이다. 환상적인 외양을 띠고 있으나 실은 고백인 진술, 저 자신을 낯선 인물로 제시하는 삼인칭의 서정, 잔혹동화 속에 숨은 삶의 연대기 등 시인 여정은 다양한 화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가상의 고통과 실재의 고통이 서로 전이되는 과정들, 몸속과 몸 밖을 넘나드는 세계와 관계 인식, 생의 기원과 매 순간의 호흡과 견딤의 긴장된 경계에 시인은 주목한다. 벌레 11호, 애인 13호 들의 멈추지 않는, 멈출 수 없는 몸짓의 언어들. 그가 휘두르는 자모子母의 검을 접하는 독자들은 가슴이 서늘하게 베일 것이다. 이제 시인 여정의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