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우에노 주리의 영화를 검색해보다가 제목이 하도 특이해 DVD로 질러버린 작품이다. 원래 일본식 코메디에 별 감흥을 느끼진 못해온터라 코메디 영화는 그다지 찾아보는 편이 아니었는데, 우에노 주리와 아오이 유우 둘이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말에 혹해 '바로 구매하기' 라고 쓰여진 파란 단추를 별 망설임 없이 무심코 눌러버렸다.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호기도 약간 발동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목의 표현처럼 '의외로' 재미있는 영화.

두 주인공 쿠자쿠(아오이 유우,く-じゃく,공작새[孔雀]라는 뜻)와 스즈메(우에노 주리,すずめ,참새[雀]라는 뜻)는 한날, 한시, 한 병원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소꿉친구다. 늘 화려한 삶과, 남다른 행운으로 타인의 주목을 받는 쿠사쿠와는 달리, 스므메의 삶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둘 다 이름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 것. 학창시절부터 쿠사쿠와의 비교로 늘 주눅이 들어있던 스즈메는 좋아하는 선배에게 고백한번 못해보고 학창 시절을 마친 후, 평범한 남자의 프로포즈에 넘어가 일찌감치 결혼한 23세의 기혼녀. 결혼 후 장기해외출장을 떠난 남편 덕에 남편이 맏겨놓은 거북이를 키워가며 홀로 살아가고 있다. 매일 한통씩 오는 국제전화를 통해 남편이 건네는 말은 오직 하나.. '거북군 밥 줬어..?' 네.. 대답이 무섭게 끊어버리는 무심하고 약간은 싸가지도 없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과 거북이 밥 주는 것 외 딱히 할 일이 없는 스즈메에게 유일한 무료함의 돌파구는 쿠사쿠. 그러나 쿠사쿠는 늘 공사가 다망한 삶으로 바빠, 간간히 하게되는 만날 약속에서 한 두시간 쯤 늦어버리는 일은 보통이다.

그날도 여느날과 다를 것 없이 약속을 어김없이 어겨버린(이 말이 재밌다. '어김없이 어겨버리다'니.. 이게 문법에 맞기나 한 말일까..^^) 쿠사쿠를 기다리며 계단을 30초 내에 오르면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는.. '혼자놀기'를 생각해낸 스즈메. 그러나, 평범하고 늘 어중간한 그녀에게 행운인들 쉽게 들이닥칠리가 없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 시계를 보며 미소를 떠올릴 즈음 사과장수 아저씨의 비명과 함께 계단 꼭대기로부터 쏟아져 떨어지는 사과들. 결국 계단에 엎드려 억수같이 굴러내려오는 사과를 피하느라 그녀의 30초 행운은 홀연히 사라졌다. 늘 그랬듯이.

그런 그녀의 일상에 작은, 아니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오고마니,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 그 옆 난간 아래쪽에 붙은 작은 스티커. 사과와 비교해도 새끼손톱 정도나 될까 싶은 엄청 작은 크기인데다 난간의 아랫단에 붙여 놓았으니, 정상적으로 계단을 오가는 이들의 눈에는 절대 띄일 일이 없는 이 스티커를 스즈메가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어엿한 중년남자 티를 내는 내 눈에는 쓰여진 글자가 절대 보일것 같지 않은 스티커에는 '스파이 모집'이라는 간단한 공고와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스즈메의 눈을 통해 확대된 사진. 뒷 전화번호 두 자리를 검은 실루엣 남자를 통해 숨겨놓은 저 센스를 보라. 그러나 평범한 스즈메는 어떻게 뒤의 두자리 번호를 알았는지 무료한 일상을 참지 못하고 드디어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국적도 목적도 미션도 알 수 없는 스파이로 선발되기에 이른다. 당장에 부여된 그녀의 미션은 거금 오백만엔을 받고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 늘 존재감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엔 자신있었던 그녀에겐 그저 그 일이 '락쇼(らく-しょう,楽勝)'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막상 의식하고 살아보니 그저 존재감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은 무엇보다 담백함이다. 다소 슬랩스틱스런 코드를 가지고 있어 쓴웃음을 자아내거나 정서적 괴리감으로 인해 생뚱맞음을 느낄 수 있는 위험을 분명 한계적으로 품었음에도 큰 무리가 없는 적정선에서의 마감질과 중간중간 소소하게 들어간 반전으로 인해 여타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청량감을 맛볼 수 있다. 그야말로 뒷맛이 깔끔한 영화랄까.

애써 기교를 부려 멋지게 보이려는 노력이 별로 안보이는 카메라 연출 역시 이 영화와 무척 잘 어울린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경치가 멋있다거나, 구도가 그럴싸해 이국적 풍경이 연출된다거나 하는 일본영화 특유의 느낌이 없다. 우리나라 서울 한복판 옛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인왕산 자락의 한 산동네 비슷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에 흐른다. 스즈메에게 스파이 교육을 시키는 중년의 부부도 동네 전통시장에 가면 시선을 돌리는데마다 들어오는 아저씨, 아주머니의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에선 어쩐지 소박함마저 느껴진다. 큰 기대없기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시간의 흐름을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