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 시인의 장자 에세이 『그 길의 그 상수리나무가』가 출간되었다. 고형렬 시인은 이미 이 책의 전편에 속하는 장자 에세이를 세 권을 출간한 바가 있는데, 제1권인 『장자의 하늘, 시인의 하늘』(소요유]편)과, 제2권 『바람을 사유한다』([제물론]편), 제3권 『장자의 양생주, 생을 얻다』(양생주]편)가 그것이다. 고형렬 시인은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를 발표하면서 등단하기도 했고 2004년부터는 『장자』 읽으며 본격적으로 장자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 펴내게 된 『그 길의 그 상수리나무』는 장자 에세이 제4권에 해당되는 책으로, 『장자』 내편(內篇) 가운데 네 번째 [인간세]편을 꼼꼼히 번역하며 시인 특유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장자를 해석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장자를 해석하지 않는 것도 아닌 특이한 방식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장자의 처세론이 반영되어 있다고 알려진 [인간세]의 핵심 주제는 우주 만물의 무용에 있다. 무용, 즉 쓸모없음으로 인해 살아남고, 살아남음이 바로 소요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는 『장자』 내편의 [소요유]에서부터 [응제왕]까지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한데, 시인 고형렬은 나그네가 되어 독자를 이끌고 [인간세]에 등장하는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인간세]에 등장하는 천하제일의 목수인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에 이르러 사당의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수 있고,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다. 그 높이가 산으로 십육 미터쯤 솟아 있고, 끝으로 가지들이 있는데, 가히 그 배를 만들 만한 것이, 두루 수십 개가 되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장을 이룬 것 같았다. 장백은 거들떠보지 않고,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제자가 그것을 정신 놓고 바라보다가, 장석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제가 큰 도끼와 작은 도끼를 잡고 선생님을 따른 이래로, 이같이 뛰어난 재목을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선 감히 쳐다보지도 않고 발길을 멈추지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하는데 장석은 “쓸모가 없어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지.”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장자』 외편(外篇)의 [산목]편에서도 장자의 입을 빌려 나오기도 한다.
가령 이러한 이야기를 시인 고형렬은 이렇게 변주한다. “장자가 보여주는 이 상수리나무 이야기는 무위의 철학이다. 또 아름다운 반성이자 우화이다. 수많은 어른과 어린이들이 이천 수백 년 간 공감해온 최고의 서사이다. 장자 외에 이처럼 아름답고 높은 인간과 나무의 교류와 소통을 이야기해준 사람이 있었을까. 천진무구한 이 글 속에 장자는 살아 있는 것 같다. 그는 어떻게 그 난세에 이 같은 평화로운 풍경을 볼 수 있고 나무를 발견하고 아름다운 만남의 꿈을 가질 수 있었을까. 천양의 글이다. 훌쩍 곡원을 지나간 장석의 소요(逍遙)도 그립다. 다시 눈구멍 밖의 광활한 자연을 내다보게 한다. 인간이 지닌 꿈이 아무리 지고해도 허무로 귀속한다. 살아 있는 것들 앞에 지나가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 무엇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데리고 간다. 그 속에서도 장자의 글은 아름답다. 자기 생의 시간 안에서 내가 아무리 그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어딜 나가본 적이 없는 역사수를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자의 글은 허무를 관통하며 아름다움을 수놓는다. 기이하다. 글이 허무하지 않다.”
장자는 [인간세]에서 어떠한 답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시인 고형렬 또한 답을 구하고 있지 않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끝없는 소요의 길 그 자체를 머물지 않고 한없이 독자를 이끌고 가는 나그네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한번쯤 그 소요 여행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