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다 한들,
백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한들,
절대 왕실의 여인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호조판서의 여식 열일곱 정재이, 왕가와의 연을 피하기 위해 한양을 떠났지만,
여의주를 찾아야만 하는 세자와 마주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끊어져 버린 인연, 덕성대군이 그의 곁에 있다는 것도.
강물에 한월寒月이 비치니
꽃에는 유운流雲이 머문다
달은 잡을 수 없이 멀고
꽃에는 향기가 없어라
간택령 이후 재이는 다시 궁에 들어선다.
이제는
세자의 여인으로.
2. 작가 소개
윤정우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것만 반복해서 보고, 듣는다.
좋아하는 것은 몇 번을 거듭해서 보아도 지겹지 않다.
시간이 쌓일수록 더 좋아하게 된다.
내가 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말을 고르고, 글을 다듬는다.
십 년째 빠져 있는 시는 ‘처용삼장’.
언젠가 그 시의 화자처럼
견고하고 강인한 사랑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깨으른 여자들’에서 활동 중.
▣ 출간작
용의 간택
우희
3. 차례
폐비의 피눈물
1. 반동反動
2. 의식意識
3. 모순矛盾
4. 비밀秘密
5. 파동波動
6. 향기 없는 꽃
7. 춘궁春宮
8. 꽃과 곤충
9. 계두鷄頭의 비책
10. 탐색探索
11. 조율調律
12. 사고事故
13. 열熱
14. 정情
15. 매향梅香
16. 미끼
17. 독毒
18. 다른 꿈
19. 타개打開
20. 춘궁의 꽃
21. 꽃의 결실
대군의 바람
작가 후기
4. 미리 보기
왕의 후계자로 태어난 세자는 일각도 낭비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암자에 온 뒤로는 마땅히 할 일이 없어졌다. 이번만큼은 편히 쉬어야 한다는 덕성의 만류로 책 한 권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반일半日을 가만히 앉아 흘려보내고 말았다.
산책을 하는 것에도 한계와 정도가 있었다. 일정하게 하는 일이 없이 시간을 허비하자니 잡념만 많아졌다. 허공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세자는 맨 처음, 단명할 것이라는 말을 듣던 날을 떠올렸다. 태연한 척했지만 열 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지난 10년간 그 말에 묶여 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고,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의주를 얻지 못하면, 끝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인지 계속 신경이 쓰인다.
마땅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권태에 젖을 만큼의 여유가 익숙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한 것이라고 치부하며 생각을 떨쳐내려 했을 때, 노승의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 모르지요. 아주 가까이에 와 있을는지.”
가까이라……. 노승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세자가 피식 웃었다. 어린아이에게 억지로 죽음을 가르쳐주었던 주제에, 이제는 모른다니. 너무 무책임했다. 노인네,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긴. 혼잣말을 하던 세자의 얼굴이 어느 순간 굳었다.
“아기씨, 인사 올리십시오. 세자저하십니다.”
계집과 세자, 두 사람 모두 지난밤에는 변복 중이었다. 둘 중 누구도 각자의 신분을 밝힐 마음은 없었다. 계집을 세자에게 소개하던 노승의 태도는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제 신분을 감추려고 애쓰는 계집을 강제로 세자에게 소개시킨 것도,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낯선 계집에게 세자의 신분을 알려준 것도, 전부 석연치 않았다.
노승이 말한 여의주는 어쩌면, 그 계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고…….”
생기 없는 눈, 힘없이 처진 어깨, 그 모습의 어디가 여의주 감이라는 말인가. 조소하던 세자는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났다. 무엇을, 어떻게 확인하고 싶어서 계집의 방으로 향하는지는 세자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밤이 깊습니다.”
만류하는 내관의 말이 옳았다. 이미 밤이 깊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출 수 없었고, 도착한 계집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세자는 선뜻, 계집을 불러내지 못했다. 차라리 신분을 모를 때가 나았다. 여염집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야심한 시각에 불러낼 정도로 가벼운 위인은 못 되었다.
바로 돌아서지 못하는 세자의 눈은 장지문에 드리워진 계집의 그림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계집이 고개를 숙인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계집이 웅얼거렸다.
“괜찮아.”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간헐적으로 들썩이는 어깨. 계집은 홀로 울고 있었다.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
애써 마음을 다잡는 것 같은 말에서 계집의 설움이 전해져왔다. 울음을 삼키려는 계집이 끅끅거린다. 지난밤, 세자가 보았던 참을성 없는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허면 어찌합니까? 지금 당장 죽겠는데.”
일부러 경박스럽게 행동하던 계집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계집의 얼굴이 선명하게 생각날 리 없다. 한참 뒤에야 허여멀건 얼굴을 생각해내었을 때,
“조건이 있습니다.”
길안내를 청하는 세자를 잔뜩 경계하던 눈빛이 스쳐갔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끝까지 제 성을 밝히지 않던 모습도.
상대방에게 진정한 모습을 내보일 수 없는 심정이 무엇인지 세자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인지 굳이 캐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니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계집의 눈물은 세자와 아무 상관없다. 그만 돌아가야 했다.
“아무것도 아냐.”
설움에 젖은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갑자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계집이야말로 세자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단 한 걸음도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결국, 계집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곳을 떠나지 못했다. 아무 때나 눈물을 흘리는 계집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첫새벽의 고요 속에서, 바알갛게 타오르는 향 끝의 연기. 향긋하고도 매캐한 냄새가 어지럽지만 견딜 만했다. 일 배一拜 후,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재이가 합장한다.
‘버리게 해주소서.’
다시 엎드린다. 손바닥을 높이 들어올리며,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고한다. 천천히 일어나는 몸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다시 합장한다. 아래로 기울이는 고개, 바닥으로 떨어뜨린 시선에는 사념이 가득하다.
‘모두 떨쳐버리고 싶습니다.’
암자의 규모에 걸맞은 아담한 크기의 불상, 조금 아래를 내려보는 것 같은 아미타불의 초연한 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에도 저의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까?’
“…….”
불상의 묵묵부답에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 뜬 재이가 불당을 나섰다.
공기가 차가웠다. 암자의 이곳저곳을 노닐던 세자의 걸음은 한가로웠지만 눈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길게 숨을 뱉던 세자는 법당 뒤로 돌아난, 자그마한 길을 따라 걸었다. 길가에 드문드문, 자그마한 돌탑들이 놓여 있었다. 걸을수록 돌탑은 점점 많아진다. 돌담의 기와 위에도 돌탑은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우기듯이 자신을 위로하던 계집의 음성이 또 생각난다. 세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노송 밑에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남 몰래 울던 계집이 밤새 신경 쓰여서 잠까지 설쳤거늘 새삼 또 떠오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짜증을 돋울 정도로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계집의 목소리가 거추장스러웠다. 인상을 잔뜩 쓰고 빠르게 걷던 세자는,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계집을 발견했다.
멀어서 계집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계집의 행동 하나하나가 세자의 눈에 들어왔다. 아주 멀리에서부터 세자의 코앞까지 오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계집은 느렸다. 계집이 세자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의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기운 없고 느릿한 계집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동안, 세자의 머릿속은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다시 울음을 터뜨렸을까? 몇 번이고, 괜찮다고 자신을 얼렀을까? 잠은 자긴 한 것일까?
한순간, 계집의 발걸음이 멈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돌탑들을 내려다보다 엉거주춤 앉은 계집이 자갈을 주워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공을 들여 탑을 쌓은 계집이 일어나 합장을 하고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도 한동안 탑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계집이 다시 세자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세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정처 없이 걷던 계집의 발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어느덧 계집이 세자의 지척에 와 있었다. 겨우 한 걸음 간격을 두고 걸음을 멈춘 계집은, 세자의 발끝을 멀거니 바라보다 황망하게 눈을 들어올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세자라는 것을 안 계집이 주춤거렸다. 어색하게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 계집의 시선도 덩달아 흔들렸다.
“세자저하, 밤새 편안하셨습니까?”
까랑까랑하던 계집의 목소리는 차가운 새벽공기에 묻힌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대답 없이 계집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세자의 시선에 고개를 슬쩍 돌리는 계집의 눈이 퉁퉁 부었다.
대체 얼마를 운 것일까? 울었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도 하지 않은 대가의 철부지가 그토록 사무치게 아파할 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계집의 부은 눈을 보니 답답함이 절로 밀려들어왔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세자가 입을 떼었다.
“소저야말로 잘 잤습니까?”
“염려해주신 덕분에 편히 잘 잤습니다.”
인사치레와 더불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세자의 주변을 훑는 계집의 눈이 분주했다. 계집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세자의 좌우를 한 번 더 살피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챈 계집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쉬움과 안도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까?”
세자의 무심한 눈길을 받으며 옅게 웃는 계집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았는데 그런 아쉬운 얼굴을 한단 말인가. 또 거짓말을 한 것으로 모자라, 세자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을 찾다니 엄청난 결례는 아니나 예의에 맞는 것도 아니다. 세자는 조금 불쾌한 얼굴로, 침울한 계집의 낯빛을 보다 시선을 돌렸다. 계집이 걸어오던 길 위에, 계집이 쌓아올린 돌탑이 걸렸다.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오래 전부터 세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탑을 쌓으며, 어떤 소원을 빌었느냐 하문하신 것이지요?”
말을 느릿하게 끌며,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하는 계집은 또 다른 거짓말을 지어내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알고 싶었다. 비밀투성이인 계집이 대체 어떤 연유로, 무엇을 바라고 이 암자에 오게 된 것인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평범한 삶을 살게 해주십사 빌었습니다.”
“그런 삶은 어떤 삶입니까?”
“여인으로서 지아비에게 예쁨 받고, 자식들에게 공경 받는 삶입니다.”
맥이 풀리는 답이었다. 고작 그뿐이라니, 한도 끝도 없이 고개를 쳐들던 계집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은연중에 더 대단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 기대를 한 것인지, 계집에게 실망 아닌 실망도 하게 되었다.
‘불면의 대가가 고작 이것이었단 말인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세자가 계집을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저 때문에 세자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세자의 조소의 이유도 모른 채, 머쓱하게 웃는 계집의 낯을 보자니 괜스레 괴롭혀주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대가 말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삶은 의도한 대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니…….”
“그리 생각하십니까? 하오나 소녀는…….”
“소저도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소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계집이 의기소침해진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계집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엄청난 사연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니지 않은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기대까지 사라졌으니 계집이 무엇이라 말하든 관심 없다. 계집이 설사, ‘가까이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여의주’라 해도.
세자는 계집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돌아서버렸다.
“저도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세자가 계집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계집은 당돌한 어조로 물어왔다.
“저하께서는 어찌 이곳에 이르게 되신 겁니까?”
세자가 계집의 얼굴을 훑었다. 세자의 시선에 눈을 들어 올린 계집과 눈이 마주쳤다. 세자와 눈이 마주쳤어도 피할 줄 모르다가 이내 자신의 결례를 알아채고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계집의 잔망스러움에 세자는 웃어버렸다.
또 알 수 없어졌다. 처음 보았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계집 행세를 하며 맹랑하게 굴던 모습이 진짜인지, 깍듯하게 예를 갖추고 있는 조신한 모습이 진짜인지…….
세자의 웃음의 의미를 가늠하며, 대답을 기다리는 계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세자는 비죽이 웃었다. 세자에게 정수리를 내보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계집을 보며 덤덤히 말했다.
“여의주를 찾으러 왔습니다.”
“…….”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계집의 얼굴이 파리했다. 눈이 휘둥그런 계집은 숨도 쉬지 못했다. 계집도 노승으로부터 여의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던 세자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졌다는 이야기, 들었습니까?”
“예, 소녀도 우연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우연히 들었단 말이지요.”
그러하옵니다. 침착히 대답했지만 계집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하지만 하염없이 흔들리는 계집의 눈빛이 세자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노승이 말한 여의주는 이 소녀를 이르는 것이 분명했다.
“나도 물어도 됩니까? 소저야말로 여기에 왜 온 것인지.”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무엇을 위해?”
“어느 가여운 여인을 위해서요.”
누구인지 묻고 싶다. 그러나 물어도 될는지는 잘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방해꾼이 나타났다.
“형님!”
세자의 하나뿐인 모제母弟, 덕성이었다. 살갑게 웃으며 다가오는 대군을 보던 세자가 문득 계집을 바라보았다. 계집은 덕성을 괴로이 바라보고 있었다. 괴로워하면서도 차마, 눈을 떼지 못하니 계집을 지켜보던 세자의 얼굴이 굳었다. 찾고 있던 것이 강이란 말인가.
“아니요. 아무도 찾지 않았습니다.”
찾는 이는 없다고 해놓고, 세자의 곁에 있을지 모르는 덕성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계집의 동생을 향한 관심을 알아버린 세자가 계집을 빤히 보았다. 계집은 저를 향한 세자의 시선을 몰랐다. 형밖에 안 보여서 계집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대군만 넋 놓고 보고 있었다.
대군의 시선은 계집에게는 닿지 않으며, 세자는 계집의 시야에 들어갈 수 없다. 표정 없이 계집을 자세히 살피던 세자의 얼굴에 비소誹笑가 떠올랐다. 한 공간 안에서 계집은 대군을, 대군은 세자를, 세자는 계집을 보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형님. 한참을 찾았사온데, 예 계셨습니까?”
세자의 앞에 다가온 대군이 재잘대기 시작했을 때에야 계집은 대군에게서 눈을 거두었다. 세자는 계집을 계속 보았다. 그제야 계집의 존재를 알아챈 대군이 계집에게 말을 붙였다.
“오, 너도 있었구나. 잘 잤더냐?”
“…….”
그렇게 뚫어져라 덕성을 바라보았던 주제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계집이 돌아서버린다. 덕성에게도, 세자에게도 물러가겠다고 고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사라졌다. 처음 제가 왔던 길을 되짚어서.
계집이 도망을 놓은 뒤, 덩그러니 남겨진 세자와 덕성이 서로를 의문스레 바라보았다.
“초면이 아니었더냐?”
“제 잠시 마주쳤었는데 저리 나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저 아이, 형님 앞에서는 말은 제대로 합니까?”
세자의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 잘만 하면서, 덕성의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분이 이상하기는 세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괘념치 말거라. 별다른 뜻은 없을 터이니.”
계집에게 무시당하고 마음이 상한 덕성을 데리고, 계집이 사라진 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세자는 계집이 쌓아놓은 탑을 내려다보았다. 볼품없는 자갈을 모아 만들어놓은 3층짜리 석탑은 여전히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러나 주인의 진심어린 소원을 담고 있을 터였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평범한 삶을 살게 해주십사 빌었습니다.”
충동적이었다. 세자는 계집이 쌓아 올린 돌탑의 가장 밑에 있던 돌을 움켜쥐었다. 돌탑이 와르르, 무너진다.
“형님?”
세자를 바라보는 대군의 눈이 둥그렇다. 계집이 공들여 만든 탑은 언제 탑이었냐는 듯이, 아무것도 아닌 자갈돌로 돌아와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던 계집의 염원을 망가뜨린 세자의 얼굴에는 죄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세자는 천천히 손바닥을 펴보았다. 납작하지만 뾰족한 돌에 눌린 손바닥 이곳저곳이 불긋불긋했다. 다시 주먹을 감아쥐던 세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손바닥을 펴자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진 돌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만 가자, 강아.”
돌아서다 말고, 바닥을 슬쩍 쳐다본 세자의 눈은 무수히 많은 돌 중 단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는 재이라고 합니다.”
정체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마음의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다. 만난 지 사흘도 되지 않았다.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미 눈길이 가는 존재, 왠지 신경이 쏠리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